▲다리뼈와 함께 발굴된 고무신을 신고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희생됐다.
심규상
박 책임연구원은 "가로 6m, 세로 1m의 좁은 구덩이 안에 몰아넣은 뒤 뒷머리에 손을 얹고 쪼그려 앉게 하고 뒷머리에 총을 쏴 사살한 다음 그대로 흙을 묻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이런 살해 방식은 골령골 3학살지와 공주 상왕동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골령골 3학살지의 경우 가로 7m, 세로 3m의 구덩이에 29명이 묻혀 있었는데 모두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뒷머리에 총을 맞았다.
머리뼈 부근에서는 여러 개의 탄피와 탄두(총알)가 나왔는데 특히 한 사람의 두개골에서 2개의 탄두가 발굴되기도 했다. 1차 사격 후 2차 확인 사살을 한 때문으로 추정된다.
전미경 대전산내사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은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살해된 뒤 그 자세 그대로 묻혀 몸뚱아리가 반으로 접혀 있다"며 "너무 참혹해 쳐다볼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유품으로는 여러 개의 혁대(가죽 허리띠)와 버클, 단추, 검정 고무신과 흰 고무신, 구두 등이 나왔다. 이중 혁대와 구두는 희생자들이 형무소나 재판 절차를 과정을 거치지 않고 연행되자마자 골령골로 끌려와 곧바로 살해됐음을 의미한다. 당시 형무소에 갇혀 있던 정치범 등은 규정상 허리띠나 구두를 신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굴단은 희생자들의 연령대나 성별 등은 유해 수습이 끝나봐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청(구청장 황인호)은 지난해 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골령골에서 234구의 유해와 5백여 점의 유품을 발굴한 데 이어 올해도 6월 초부터 유해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대상으로 최소 4000여 명, 최대 7000여 명의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가해자들은 충남지구 CIC(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이었고, 그들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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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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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령골 초입 구덩이에 몰살당한 17명 "반으로 접힌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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