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숙 논문의 일부.
윤희숙, 한국응용경제학회
그 자신도 인정했다시피 가구소득에서 임금소득이 가장 많으므로, 모든 유형의 소득에 대한 파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소득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아무래도 임금소득 부분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 임금격차 해소만으로 소득불평등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임금격차 해소만큼 유용하고 현실적인 수단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윤 의원은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임금소득 이외의 여타 소득도 많다면'서 임금격차 이외의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고 있다. 그러면서 임금격차 해소 방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표출하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보다는 곁가지에 집중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임금 격차 외의 다른 요소도 있으니 부분적 분석을 하지 말고 전체적 분석을 하자고 했지만, 실상은 그 역시 임금 문제 외의 다른 요소들만 놓고 부분적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장 제2절에서는 노동소득분배율을 통한 소득불평등 측정이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이 감소하는 것은 기술진보로 인해 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주목되는 것은 기술혁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이를 이용할 수 있는 근로자의 경쟁력을 높이고, 그렇지 못한 이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본질적인 변화가 일국적인 범위를 넘어선 글로벌 차원의 변화라는 점이며, 이 과정에서 자본과 노동 간 세력관계가 근로자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전환되는 흐름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글로벌 차원의 기술발전 때문에 노동소득이 감소한다는 주장은 틀리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국 차원의 소득불평등을 악화시키는 글로벌 차원의 요소가 과연 그 정도에 불과한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부의 정책적 개입은 필요 없다?
윤 의원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글로벌 감각을 충분히 익혔을 그가 지난 40년간 노동자와 대중을 억압해온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지구 북반구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를 모를 리 없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은 재벌과 대기업이 더 많은 이윤을 차지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이런 신자유주의가 코로나 사태 이전까지 북반구 경제를 좌지우지했다는 점은 굳이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웬만하면 다 알 수 있다. 사회당 출신의 프랑수아 미테랑 정권(1981~1995년)이 잠시나마 신자유주의에 저항했다가 굴복한 이후의 상황을 장석준 전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 후로 북반구에서 화폐자본 중심의 지구 자본주의 재편을 거역하거나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국민국가 차원의 시도는 중단되었다. 달러-월스트리트 체제의 성장에 균열을 내거나 이를 교란하는 움직임은 한동안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드디어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 상당부분을 식민지로 전락시키며 맹위를 떨치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각국 자본가들의 상호 항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상당 부분 힘을 잃었다. 이 틈을 타서 6·8혁명으로 대표되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힘을 얻다가, 신자유주의가 반격에 나서 1980년대 중반부터 지구를 지배했다.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의 제도와 법률은 노동자나 대중보다는 재벌과 대기업 위주로 한층 촘촘히 공고화됐다. 이것이 양극화를 재촉한 핵심 요인에 포함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득불평등을 초래한 글로벌 차원의 원인을 언급하려면 지난 40년간 신자유주의로 인해 빚어진 제도적 불평등을 언급하는 게 마땅한데도, 그는 글로벌 차원의 기술발전 같은 것에만 주목했다. 기술발전이 소득불평등을 낳는다는 점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소득불평등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바람직한 일이라는 논리까지 성립한다. '위드(with) 불평등'을 감내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윤 의원은 제3절에서는 최상위 1%의 소득이 얼마나 많은지를 따지는 방법은 효용성이 낮다고 말한다. 조세 통계를 통해 최상위 1% 및 그 소득을 측정하는 방식은 과세 자료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채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 국세청에 잡히지 않는 지하경제 규모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므로 타당성이 더욱 떨어진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하경제를 잡기 전에는 최상위 1%가 얼마나 많은 부를 독과점하고 있는지를 조사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지금의 부조리 상태를 천년만년 방치하자고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다. 또 과세 체계가 불완전하므로 그에 기초한 소득불평등 조사를 유보하자는 것은 이런 조사를 하지 말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제4장에서는 고령화 문제를 상세히 다룬다. 고령 가구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낮으므로 고령화에서 소득불평등의 원인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고령자 비중이 늘어난 것은 빈곤율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주요인"이라고 말한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과연 이것이 '주요인'인가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고령화를 세계화·기술변화와 더불어 소득불평등의 3대 주범으로 거론했지만, 고령화가 과연 그 정도의 문제인지를 냉정하게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전체가 아닌 일부만 보여주는 방식의 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