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주인 할머님은 고추노린재가 붙은 고춧대를 흔들어 땅바닥에 떨궈 죽이고는 붉은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박진희
호들갑에 뭔 큰일이 날 줄 알고 다가와 살피시던 할머님의 손길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큰일 났네. 벌써 쳤어야 하는데, 약을 안 쳤더니 벌레가 꼬였네."
"왜 약을 안 치셨어요?"
"이쪽 고추는 우리 며느리가 따 간다고 해서..."
할머님은 고춧대를 바닥 쪽으로 휘어잡고 세차게 흔들어대셨다. 벌레들은 좌우로 요동치는 고춧대에서 바닥으로 추락했고, 종국에는 할머님의 발끝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몇 차례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할머님은 벌레와의 사투를 멈추시더니, 전술을 바꾸셨는지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기 시작하셨다.
"고추 따시게요?"
"약을 못 치니 일단 따서 말려야지."
곱게 익은 고추를 따는 할머님 손 너머로는 여전히 고춧대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벌레 무리가 보였다. '으엑, 징그러!'
할머님은 애써 지은 고추 농사를 망치는 천적의 이름을 모르셨다. 나라도 처음 보는 벌레의 정체를 밝혀내고자 집에 도착하자마자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고추밭의 침입자들은 '고추 노린재'였다. 그 종류만 무려 10여 종이나 된단다.
고추 노린재는 식물 줄기의 즙을 빨아 먹고 살기에 식물을 말라 죽게 하며, 탄저병을 유발하고, 직접 만지면 악취까지 풍기는 해충이었다. 이놈들 말고도 총채벌레, 담배나방 등 고추 농사에 천적은 여럿 있었다. 할머님께 이 중차대한 정보를 한시바삐 전하고파 마음이 급해졌다.
다음날 점심 때쯤 할머님댁 텃밭에 다시 가 봤다. 할머님댁에서 드실 울타리 안쪽 고추밭에는 결국 살충제가 뿌려졌는지 고추밭은 이미 하얀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들네 몫으로 키우는 고추밭도 살펴봤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고추 노린재는 군데군데 떼로 몰려 있었으니, 할머님께 여쭙지 않아도 약을 치지 않은 증좌는 충분했다. 게다가 전날은 미처 발견 못한 황갈색 알까지 고춧잎 뒷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병반없던 고추나 고춧잎은 여전히 말끔했다.
고추를 키워는 봤어도 꽃 한 번을 제대로 피워 본 적 없으니 입때껏 몰랐다. 베테랑 농군이든 아니든 간에 모종을 심어 때깔 좋은 고추를 거두려면 여름내 손가락 관절이 저리도록 풀을 뽑고, 죽을힘을 다해 병충해를 막아내야 한다는 것을. 그리 공들여 키워냈으니, 쉬운 길을 마다하고 수백 번 수천 번을 매만져 수확한 고추를 말릴밖에...
아들네가 먹을 고추를 지켜내려면 할머님은 얼마간 '고추 노린재'에게 매운맛을 더 보여주셔야 한다. 할머님의 마지막 정성이 보태져 맛깔나게 익어갈 김치와 고추장을 떠올리니,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 물색없이 입안 가득 군침이 돌고야 만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보고 듣고 느끼는 소소한 일상을 욕심껏 남기고자 합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