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리화가>의 한 장면. 우리 협동조합에 관해 만들어진 '아니리'는 이렇게 공연된 게 아니라, 두세 명이 모여 속닥속닥 전해졌을 것이다.
CJ ENM
실제의 사건
반장과 우 이사, 남편과 내가 하씨 아재의 집을 방문했다. 마당에서 한참을 불렀지만 아재는 집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재는 젊었을 때부터 청력이 좋지 않았는데, 평소에 귀찮다며 보청기도 잘 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문을 두드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누워서 TV를 보고 있던 아재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반장이 바닥에 엉덩이를 대며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 귀도 잘 안 들리는 양반이 뭔 TV 볼륨은 이렇게 깨작깨작 작게 틀어놓고, 뭐 하는 거요?"
"자네들, 왔는가. 밥은 묵었고? 그래 요새 내가 밥맛이 없어가꼬. 그래도 점심을 깨작깨작 묵기는 했지."
"어이구, 형님! 협동조합 서류 만드는데, 형님 인감도장 한 번 찍고, 저기 면사무소 가서 인감증명서 한 장 뗍시다."
"뭐라꼬? 면사무소에 우리 형님이 왔따꼬? 우리 형님은 벌써 진즉에 세상 버렸뿟는데?"
"답답해 죽겠네. 형님! 보청기 좀 끼라니까."
반장은 방바닥에 놓인 보청기를 아재에게 건넨 뒤 '개인정보 제공 및 활용 동의서' 서류를 내밀었다. 글을 배우지 못한 아재는 서류를 보자마자 얼굴 전체가 시뻘게졌고 곧이어 눈의 흰자위도 벌겋게 충혈 되기 시작했다.
협동조합 설립 서류 중에 '개인정보 제공 및 활용 동의서'라는 것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관공서에서 성명, 주소,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같은 개인정보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것에 동의한다는 서류다. 이 서류의 서명란에 각 개인이 인감도장을 찍어야 하고, 인감증명서를 발부받아 첨부해야 한다.
"형님, 요기에다 인감도장 한 번 찍고, 나하고 면사무소 가서 인감증명서 한 장 뗍시다."
"인감도장이라꼬? 그기 다 뭔 소리고? 너거가 몰리댕기믄서 뭔 작당을 하는지 모르겄다마는, 나는 인감도장 절대 몬 찍는다. 차라리 날 쥑이삐라! 내가 까막눈이라꼬 너거가 날 속일라 카는 거, 내가 모릴 것 같나?"
"답답하네. 형님! 그게 아니라, 협동조합 조합원이 되려면 이 서류에 인감도장을 꼭 찍어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내가 인감도장 한 번 잘몬 찍어가꼬 평생 벌은 돈 다 날린 거, 어데서 듣기는 들은 갑네. 내 재산은 인자 이 집하고 쪼매난 밭떼기밖에 없따꼬. 인감도장 찍어라 캐가꼬 요것들까지 너거가 다 빼묵을라꼬? 요고까지 없어지믄 나는 죽은 목숨 아이가. 내보고 죽어라꼬? 택도 없다! 인자 보이까네, 협동조합 요고 무섭은 기네. 차말로 무섭데이."
나처럼 이 사건을 직접 겪은 당사자의 관점에서는 동네에서 떠도는 이야기가 참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배배 꼬인 왜곡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한 사건의 사실관계가 이런 식으로 왜곡·변조될 수 있단 말인가. 남편은 음모론의 추종자답게 이러한 날조를 조직적인 음해 공작이라고 단정 지었다. 하여간, 쯧쯧, 이 마을에 몇 명이나 산다고, 조직적인 음해 공작씩이나···.
귀신·구미호 취급받는 협동조합
어쨌거나 우리 동네에서 전설·설화·민담 같은 구전 문학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은 70년대 중반쯤이었다. 돌아가신 우리 아빠가 새벽에 남원과 함양의 경계인 매치골 고갯길을 넘어오다가, 도깨비들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사건이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민담의 소재였다.
작업반장의 아버지가 마을의 남쪽에 위치한 연비산에서 호랑이를 맞닥뜨린 것, 김 영감이 총각 때 산에서 처녀 귀신을 만나 지게에 모은 땔감도 내던지고 혼비백산 줄행랑을 친 사례, 하씨 아재의 아버지가 구미호에게 홀려서 밤새 공동묘지 주변을 맨발로 맴돈 사건 등등. 이런 일들은 구전 문학으로 가공되고 변형되어 터줏대감처럼 동네에서 버티고 있었다.
도시와 달리 우리 마을은 70년대까지도 많은 사건이 이야기로 만들어져 구전되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대량 생산된 타인의 서사가 화제의 중심이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할머니나 이웃이 겪은 일들이 익살스러운 때로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변해 대폿집과 투전판, 빨래터와 문방구에서 전염병처럼 떠돌았다.
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런 얘기들을 들으며,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결말로 서사 구조를 바꾸는 놀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고 말하는 경험을 통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내 조상들과 이웃들의 삶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시간을 가진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기억의 대체물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보통 이런 이야기들에는 귀신·도깨비·구미호 같은 것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잘 모르는 것, 이해하기 힘든 것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불안 같은 감정이 물질적인 형상으로 표현된 것이 귀신·구미호 따위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마을기업이나 협동조합도 귀신·도깨비·구미호와 비슷한 속성을 지닌 존재라 할 수 있겠다. 마을의 구성원들에게 협동조합과 마을기업은 잘 모르고 이해할 수 없어서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씨 아재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씨 아재에게 이제 협동조합은 우리 동네의 민담에 단골로 등장했던 귀신·구미호나 다름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귀신과 구미호는 죽음과 결합되어 있어서 늘 두려운 존재이듯이, 협동조합 역시 자신의 경제적 죽음과 연결된 공포의 대상인 것이다.
어쨌든 하씨 아재는 인감도장 사건이 일어난 그날 마을기업 회원에서 바로 탈퇴했다. 아재가 탈퇴한 시점은 본격적으로 협동조합 서류 작성이 진행되기도 전이었다. 아마도 아재에겐 협동조합이 일종의 악(惡)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씨 아재와 나
공포와 두려움을 수반하는 잘 모르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현상을 막연하게 악(惡)으로 여기는 것은 인간의 본능 혹은 심리적 구조가 아닐까 싶다. 죽음에 관여하고 있는 귀신·구미호가 우리 동네 민담들의 선악 대결 구조에서 거의 다 악으로 규정되듯이 말이다.
2014년 초겨울 내 할머니의 장례식이 떠오른다. 화려한 꽃상여와 가족의 오열·침묵, 그리고 한쪽에선 동네 주민들의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 아침부터 막걸리와 소주에 취해 트로트를 부르던 하씨 아재의 모습도 생각난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목이 터져라 '뽕짝' 메들리를 반복해서 기계처럼 불러 젖히는 것이 아재가 우리 할머니를 떠나보내는 나름의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