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작을 이룬 햇고추고추는 첫물보다 두세물 때가 더 좋다고...본격적으로 고추를 수확에 들어간다
박향숙
일을 분담하기 위해서, 엄마는 고구마 두둑으로, 나는 고추두둑으로 갔다. 사실, 고구마 줄기의 어디까지를 따야되는지를 몰라서 자진하여 고추를 딴다 했다. 고추나무들이 자라서 두둑 사이가 좁아졌고, 고추의 매운 냄새가 가득하여, 고추 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롱대롱 가득찬 빨간 고추를 보니, 섬에서 호미질에 우수수 걸려 나온 바지락을 보듯 황홀했다. 들고 들어간 상자에 잘 익은 고추를 가득 채울 때까지 땀이 비오듯 했지만, 풍작의 기쁨이 바로 이런 것 아닌가!
엄마는 고구마 줄기를 따며, 남아있는 줄기들의 머리 방향을 햇빛이 비추는 쪽으로 돌려 놓았다. 그래야 고구마 열매들 밑이 튼실해져서 고구마를 얻는다고 하셨다. 마침 모기들이 윙윙거리는 걸 보고 한 마디 하셨다.
"오메, 웬 모기들이 뭉든 안개 피어나듯 쏟아져 나온다냐. 모기가 사방에서 물어뜯는다."
"하여튼 엄마는 역시 화술의 대가야, 모기떼를 보고, 안개를 비유하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을 걸요. 얼마 전에도 말조심 하라고 하면서 하신 말씀이 뭐였죠? 벌써 잊었네."
"그런 기억력으로 공부는 어떻게 했다냐. 나는 이 나이까지도 전화번호를 100개도 더 외운다. 옛날부터 어른들이 말하길, 남의 말을 전하는데 조심하라는 뜻으로 남의 입술에 걸리지 말라고 했다."
옆에 있던 남편은 "이렇게 어머니랑 각시가 같이 나와서 농사 지은 거 담으며 어머니 말씀 들으니 참 좋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당신은 글 쓴다면서 어머니 말씀 하실 때마다, 잘 새겨 들으소. 어머니 말이 아니면 알지 못할 말이 얼마나 많은가"라며 아부가 끝이 없었다.
사실 엄마의 사고와 말에는 변함없는 한가지 사실이 있다. 만상을 모두 살아있는 생물체로 비유하는 화법이다. 작년에도 엄마가 호박을 보고 하신 말씀 한 마디(호박이 제 어미를 닯아서 이쁘네)를 듣고 처음으로 에세이를 쓰겠다고 마음 먹었다. 평생을 들어온 엄마 말씀이 비슷할텐데 유독 다르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태양초 고추가루를 만들어 주신다고 내가 땄던 빨간 고추를 그물대에 널어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발걸음을 하셨단다. 고구마 순 김치를 단기간에 맛있게 먹는 방법 중 하나가 줄기 껍질을 벗겨내고 생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살짝 데친다고 하셨다. 따온 빨간고추를 믹서기에 갈은 순고추양념과 섬에서 담아온 귀한 액젓으로 김치를 담가 보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