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와 가족이 되면서 생명의 온기가 얼마나 따스한지 알아갔다.
unsplash
은이를 입양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은이와 함께 아이의 하굣길에 마중을 가고 있었다. 그 때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옆 동 이웃을 만났다. 나는 우리의 새로운 식구 은이를 소개했다. 그러자 그 이웃은 혀를 끌끌찼다.
"아이고, 애를 하나 더 낳으라니까. 하나는 외롭다고 했잖아. 애는 안 낳고 개를 키우면 어떡해?"
아이가 어리고, 내가 좀 더 젊었을 때 이웃들은 종종 이렇게 우리 가족을 걱정해줬다.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나는 '애 하나 더 낳으라'는 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런 말을 들었다.
역시 은이와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벤치에 어르신 몇 분이 모여 있었다. 그 중 한 분이 은이를 불렀다. 사람을 매우 잘 따르는 은이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갔다. "아이고 이쁘네"를 연발하며 은이를 쓰다듬어 주는 그분께 나는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분은 이렇게 말했다.
"한 마리만 키워? 나도 개를 키우는데 둘이 좋아. 혼자는 외로워서 안 돼. 한 마리 얼른 더 들여."
"아이 하나 더 낳으라"고 했던 그 수많은 목소리들과 완벽하게 겹쳐졌다. 익숙했던 불편함이 다시 올라왔지만, '개엄마'가 처음인 나는 걱정이 앞섰다. 며칠 후 동물병원에 방문했을 때 수의사 선생님께 물었다. 정말 개도 혼자 크면 외로움을 타서 안 좋은 거냐고 말이다. 그러자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고 말씀하셨다.
"그건 강아지마다 달라요. 한 마리 더 들였다가 스트레스 받아서 힘들어하는 강아지들도 많아요. 은이는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게 강해서 혼자가 더 행복할 거 같은데요?"
나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 외에도 은이와 길을 갈 때면 종종 낯선이에게 '왜 개에게 옷을 입히냐', '일주일에 한 번은 돼지고기를 삶아줘라(은이는 돼지고기 알러지가 있다!)', '살 좀 빼야겠다(나 말고 은이!)' 등 다양한 충고들을 듣는다. 물론, 이런 충고들은 반려인으로서 친근감과 자신에게 좋았던 경험들을 나누고픈 '선의'에 의한 것들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개들도 사람처럼 다 다르다.
성격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다르고, 다른 개나 사람에게 친밀감을 표현하는 정도도 다 다르다. 그리고 그 개를 키우는 반려인의 사정도 각각 다르다. 때문에 선의에 의한 충고들이 때로는 '관심'보다는 '침해'라고 느껴지곤 한다. 반려문화가 깊어질수록, 반려인의 세계에서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유기견은 안돼요 → 좋은 일 하시네요
은이를 막 입양했을 무렵이었다. 은이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같은 동에 사는 이웃을 마주쳤다. 역시 반려인이었던 그 이웃은 내가 강아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은이도 연신 꼬리를 흔들어 댔다.
"사람을 반기는 걸 보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개네요. 유기견들은 사람을 너무 경계하고 정도 잘 안주고 버릇도 나쁘더라구요. 어디서 데려오신 거예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차마 '유기견 출신'이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친구가 키우던 강아지인데 외국으로 가게 되면서 제가 키우게 됐어요."(적고 보니 참으로 부끄럽다!)
하지만,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고 '유기견 입양 프로젝트'를 펼치는 TV 프로그램까지 생겨난 요즘, 나는 더이상 은이의 출신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 유기견 보호소에서 만났어요"라고 당당히 밝히고 "우리 개도 보호소 출신이에요"라고 말해주는 동지를 만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내게 돌아오는 답변은 대체로 이렇다.
"아이고. 좋은 일 하셨네요."
나는 칭찬인 듯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어딘지 씁쓸한 마음이 밀려온다. 개를 '사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일이고 '유기견 입양'은 봉사처럼 여겨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물론 '유기견은 안돼요'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시선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유기견 입양이 좋은 일이 아닌 당연한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명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게 상식이 되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무슨 몰티즈가 이렇게 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