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개정 교육과정으로 개편된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목차. 개항 이전의 전근대사는 전체 분량으로 치면 1/4에 불과하다.
서부원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한국사 교과서가 개편되면서 아이들의 역사 인식에도 적잖은 변화가 일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영역이 절대평가로 전환되면서 학습 부담이 크게 줄어든 점도 한몫을 했다. 단순 암기 과목이라는 오랜 편견에서 벗어나 탐구 과목으로 탈바꿈 중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전근대사에서 근현대사로 관심의 무게추가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해방 즈음에 진도가 끝나 아이들의 머릿속에 한국사의 시대적 범주는 고조선에서 기껏해야 일제강점기였다. 거칠게 말해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한국사가 아니었다.
천오백여 년 전 인물인 광개토왕이나 을지문덕을 모르는 아이는 없지만, 불과 수십 년 전 장준하와 김준엽이라는 이름을 들어봤다는 아이는 거의 없다. 광복 이후 활동했던 역사 인물을 아는 대로 말해보라면, 역대 대통령을 제외하곤 채 열 명이 안 된다. 배운 적이 없어서다.
근현대사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보니, 주위의 익숙한 문화유산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것들뿐이다. 복원된 것일지언정, 석탑과 목조 건축물 등은 족히 수백 년도 더 된 것들이다. 국보나 보물 등 지정 번호가 붙은 중요 문화재이지만, 봐도 그다지 감흥이 없는 이유다.
문화재마다 사연과 내력이 있기 마련이지만, 오래된 것일수록 역사적 사실보다 전설이나 신화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구전을 통해 각색된 까닭에 들어보면 재미는 있어도 신빙성이 떨어져 자칫 역사가 희화화될 가능성이 크다. 오랠수록 기록이 부족한 한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근현대사 유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남아있는 사료가 풍부해 오히려 다 챙겨 읽지 못하는 걸 걱정해야 할 정도다. 전근대사에 견줘 관련 유적도 훼손이 훨씬 덜한 상태여서 관심만 있다면 활자화된 기록 못지않은 정보를 줄 수도 있다. 무릇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근현대사 중심으로 개편된 한국사 교과서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일제강점기 역사다. 전체 4개의 대단원 중 당당히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다. 반만년 우리 역사 중 불과 35년간을 한 단원으로 설정할 만큼, 일제강점기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방증이다.
참고로, 교과서의 4개 대단원은 이러하다. 고조선부터 개항 이전까지의 역사, 곧 전근대사가 첫 단원이고, 개항 즈음부터 국권 피탈까지의 역사가 두 번째 단원이다. 세 번째가 일제강점기이고,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마지막 단원이다.
아이들이 가장 혐오하는 역사 용어
배운 적이 없으니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관심이 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공부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승만과 김구, 안중근과 윤봉길 외에도 여러 인물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젠 김좌진과 홍범도는 인지도로 치면 김유신과 이순신 못지않다. 김원봉을 비롯해, 윤세주, 김상옥, 김익상, 나석주 등 의열단원의 이름도 그다지 낯설어하지 않는다. 유관순밖에 몰랐던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김마리아와 차미리사, 남자현, 박자혜, 주세죽 등 여럿을 꼽는다.
이완용과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그리고 박제순. '을사오적'의 이름은 요즘 아이들에게 필수 교양이 됐다. 다른 친일파를 대라면, 이광수와 최남선, 최린과 윤치호, 김성수와 방응모, 박흥식과 김활란 등의 이름이 술술 나온다. 일제강점기의 분량이 대폭 늘어난 교과서의 힘이다.
배우면 배울수록 친일파는 아이들이 가장 혐오하는 역사 용어가 됐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8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친일 청산 문제가 왜 여전히 화두인지 묻고 답을 찾아보려는 아이들이 드물지 않다. 나아가 주변에 친일 잔재는 없는지 성찰하는 자발적인 움직임도 보인다.
아이들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교사로서 근현대사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부에선 교과서가 지나치게 근현대사에 편중돼 있다고 지적하지만, 역사 교육의 본령을 떠올려본다면 몽니로 비칠 뿐이다. 그런데도 잘못됐다고 여긴다면,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라.
"할아버지 세대의 삶과 아버지 세대의 삶 중 어느 것이 현재 아이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칠까?"
'의향'의 역사를 품고 있는 광주공원
때마침 '보물섬'을 발견했다. 광주광역시가 지정한 제1호 공원으로,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광주공원이 그곳이다. 이웃한 사직공원과 함께 사시사철 울창한 숲이 도시의 허파 구실을 한다. 도심 속 공원이지만, 찾아간 당일엔 방역지침을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이곳 광주는 모두에게 5.18 민주화운동으로 대표되는 고장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광주에 빚졌다'는 말도 5.18에 기인한다. 1980년 당시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싸웠던 시내 곳곳에 사적지 표석이 세워져 그 의미를 더한다. 말하자면, 광주가 5.18이고 5.18이 광주다.
그러나 5.18 당시 보여준 놀라운 시민의식이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였을 리는 없다. 예로부터 광주는 '의향(義鄕)'으로 불려왔다. 광주시민의 몸에 유전자 정보(DNA)처럼 면면히 전해져온 불의에 맞선 저항 정신이 1980년 당시 다시금 표출되었을 뿐이다.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다.
'의향'이라는 별칭은 국권 피탈 이전인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학농민운동의 탯자리인 데다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직후 조선을 침탈한 일제에 맞서 가장 활발한 의병 활동을 전개한 곳이 광주를 비롯한 호남이다. 양반 유생은 물론, 머슴 출신의 의병장이 나올 정도였다.
기실 1909년 일제가 저지른 '남한 대토벌 작전'도 '호남 의병 초토화 작전'이라 명명해야 옳다. 당시 일제는 호남을 의병 세력의 근거지로 여겨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사료에 따르면, 구한말 의병의 수와 전투 횟수의 절반 이상이 호남에서 벌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두어 달 동안 희생당한 의병의 숫자만 1만 8000명에 이르는데 대부분이 호남 의병이었다. 의병장을 비롯한 대부분은 현장이나 감옥에서 처형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의병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다. 호남 의병의 전멸은 1년 뒤 국권 피탈로 귀결됐다.
그 '의향'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 바로 광주공원이다. 수백 년 전부터 최근까지 광주가 겪은 모든 역사의 자취가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쉬엄쉬엄 걸어도 한 시간 남짓이면 다 돌아볼 정도로 소담한 공원이지만, 이곳이 지닌 역사의 무게만큼은 가볍지 않다.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