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장면을 담은 '대전전투 기념주화'를 만들었다.
평화통일문화교육센터
실제 육군본부가 펴낸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제1집>(1963)을 보면 이 사진 밑에 '갑천에서 주도로를 감제(내려다보며 제어함)하는 기관총 진지'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트루먼 도서관의 미국 자료에서도 '유성 갑천'이라고 표기했다. 국가기록원 자료 설명에는 '유엔군 대전 북방 갑천강 방어'라고 나왔다. 역시 대전의 갑천으로 판단했다.
또한 위키백과에서는 '정림동(대전 서구) 가수원다리를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배치된 미 24사단 19연대 소속 기관총반 병사들'로 설명해 아예 미 24사단 소속의 대전 전투 장면으로 못 박았다. 이 때문에 이 사진은 6.25 당시 대전 전투를 상징하는 대표 사진으로 각인됐다. 미국에서도 이 사진 속 장면을 담은 '대전전투 기념주화'를 만들었다.
'대전 갑천'이라면 정확한 지점은 어디일까?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가 사진 속 장소를 찾아 나선 것은 약 1년 전쯤이다. 이 단체는 지난해 대전전투 사진전에서 이 사진을 소개하며 관람객들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공개 질의했다. 이후 몇몇이 의기투합해 사진 속 장소를 직접 찾아 나섰다. 노원록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이사, 고혜봉 대전향토문화연구회 사무국장, 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 안여종 (사)대전문화유산 울림 대표, 임재근 평화통일교육연구소장, 정성일 유튜브 '대전통' 크리에이터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우선 사진 속 장소를 대전의 하천으로 보고 대전의 3대 하천(대전천, 유등천, 갑천)에서 6.25 당시 교량이 있던 곳을 확인했다. 이런 방법으로 범위를 좁혀 나갔다. 하지만 대전도, 갑천도 아니었다.
이들은 다시 유성 나들목과 회덕 나들목이 있는 대전의 북쪽 지형을 살폈다. 아니었다. 다시 대전 이남의 충북 옥천 부근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 '옥천 장계교가 확실하다'는 한 주민의 제보도 있었다. 현장을 확인했지만 사진 속 장소와 달랐다.
희망의 단서, 미군과 국군이 함께 있는 또 다른 사진
이들은 이때부터 미궁에 빠졌다. 그러다 소레이스 일병이 직전에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단서를 찾았다. 미군과 국군이 함께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미군과 국군이 같이 전투를 벌였다면 '이화령-문경 전투'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화령-문경 전투'는 한국 전쟁 초인 7월 13일부터 시작된 조령과 이화령의 싸움이 7월 17일에 영강선(문경 남쪽의 낙동강 지류) 방어로 매듭짓기까지의 전투를 말한다. 북한군은 7월 20일까지 문경을 거쳐 울산까지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남쪽으로 향했다. 반면 미군은 문경으로 한걸음 물러서 새로운 방어선을 세우면서 쌍방이 혈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는 미 25사단과 국군 6사단이 통합해 방어전에 나섰다.
미 24사단의 행적만을 뒤지던 일행은 경북 문경으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러다 최근 지형이 유사한 문경 토끼비리를 찾았다. 토끼비리는 옛 영남대로의 일부로 토끼가 지나다닐만한 좁은 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산세와 바위, 하천의 모습은 71년 전 사진 속 모습 그대로였다. 강은 문경의 '영강'이었고, 다리는 '진남교'였다. 틈틈이 사진 속 장소를 찾아 나선 지 약 일 년만이었다.
71년 전 사진 속 산세 그대로... 소총 탄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