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무렵 마루젠츠타야, 키노쿠니야와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서점이다. 마루젠(丸善)은 1869년 문을 열었다. 설립자는 하야시 유데키(早矢仕有的)다. 2015년 준쿠도서점과 합병하여, 현재는 ‘마루젠준쿠도서점’이 되었다. 마루젠은 야마베 겐타로의 첫 직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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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젠에서 1년 반 직원으로 일한 후, 야마베는 노동 운동을 하기 위해 서점을 그만뒀다. 1920년 그는 양말(버선)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1921년 5월 1일 오사카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에 야마베가 참여했을 때, 그의 나이 불과 열다섯이었다. 이 무렵 그는 "작은 틈도 아껴서 공부했다"라고 할 만큼, 책과 사회주의 잡지를 탐독했다.
1923년부터는 고이와이 기요시(小岩井淨)가 운영한 자유법률상담소에서 일했다. 고이와이 법률상담소는 당시 좌익의 거점 같은 곳이었다. 노동자로 일하면서 야마베는 월급이 생기면, 사회과학 및 사회주의 서적을 구입해 읽으며, 공산당과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야마베는 1920년대 일본에서 접할 수 있는 사회주의 문헌 대부분을 읽었다. 사회주의 문헌을 '독파'한 그를 두고,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를 비롯한 일본 사회주의 이론가 사이에 '천재가 나타났다'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스물한 살이었던 1925년, 야마베는 일본 노동조합평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했다. 이 과정에서 야마베는 '지도부'로, 일본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1926년에는 하마마츠(浜松) 일본악기 쟁의에 참여했다. 오사카에서 공산청년동맹 재건 운동을 벌이던 그는, 1929년 4.16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야마베는 복역 중 전향을 거부하고, 1933년 12월 만기 출소했다. 출소 후 다시 노동조합 운동을 벌인 그는, 1941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도쿄 도요타마(豊多摩) 형무소 안에 있는 예방 구금소에 갇힌 그는,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야마베는 일본 패전으로부터 두 달 후인 1945년 10월 10일에야 출소할 수 있었다.
야마베는 왜 '전향'하지 않았을까? 일본 역사 연구자인 기쿠치 마사노리(菊地昌典)가 야마베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이 질문에 야마베는 이렇게 내뱉었다.
"그건 성격이야. 타고난 성격이지. 이론 따위가 아니야. '이 빌어먹을' 하는 근성이 없으면 안 돼."
타고난 반항 기질이 그를 '비전향 사회주의자'로 만들었다. 실제로 야마베는 자신이 사회주의 운동가가 된 이유를 <사회주의 운동 반생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타고난 반골과 시대 풍조 탓에 사회주의의 길로 내달렸다."
일본인인 그가 한국 근대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