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솔자와 참여인원영솔자와 참여인원
김삼웅
오합지졸일 수밖에 없는 농민군의 진영은 예상보다 빨리 정비되었다. 대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까닭에 모든 사람이 솔선수범하였기 때문이다. 지휘본부에는 <동도대장>이란 대장기에 '보국안민(輔國安民)' 네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하늘 높이 게양되었다. 그리고 각지에 다시 격문을 보내어 참여를 호소하였다.
격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의 본의가 단연 다른 데 있는 것 아니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자는 데 있다.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는 데 있다.
양반과 부호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과 방백(方伯) 수령(守領) 밑에서 굴욕을 당하고 있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갑오 정월 일
호남창의대장소
격문을 띄운 지 며칠이 지나자 호남 일대의 동학교도와 일반 농민들이 거사를 지지하며 구름처럼 몰려왔다. 동학의 포가 있는 지역은 각자 지역별로 기포(起包)하여 소속 창의대장소로 모여들었다.
고부 백산을 중심으로 인근 각 읍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광ㆍ옥구ㆍ만경ㆍ무안ㆍ임실ㆍ남원ㆍ순창ㆍ진안ㆍ장수ㆍ무주ㆍ부안ㆍ장흥ㆍ담양ㆍ창평ㆍ장성ㆍ능주ㆍ광주ㆍ나주ㆍ보성ㆍ영암ㆍ해남ㆍ곡성ㆍ구례ㆍ순천ㆍ전주 등지의 교도가 거의 때를 같이해서 일어났다.
모여드는 군중은 비단 교도들뿐이 아니었다. 관의 행패와 양반, 토호들의 극악한 착취에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백성들이 동학의 깃발 아래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렇게 모인 농민들은 지역별로 동학의 포와 접의 조직에 흡수되어 군장의 지휘아래 교인들과 동일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아침나절에 팔십여 명밖에 안 되던 포에서도 저녁 때이면 그 인원이 이백 명, 혹은 삼백 명으로 늘어났다.
식량의 조달은 관아의 창고에 쌓여있는 세미(稅米)를 가지고 넉넉히 충당할 수 있었지만, 인원이 늘면 느는 대로 곧장 군막을 새로 쳐야 했다. 무장 일대는 밤늦도록 군막을 치는 망치소리가 끊일 사이가 없었다. 밤이면 군데군데 화톳불이 찬란했다. 대장소에서는 전봉준을 비롯하여 그 지도부가 둘러앉아 전략을 짜기에 밤낮이 없었다.
한편에서는 군사를 조련했다. 총질에 익숙한 사람은 특별히 선발되어 군기고에서 탈취한 화승총으로 무장을 갖추고 사격하는 연습을 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대를 베어다가 죽창을 만든다, 궁장이는 활을 메운다, 화살을 다듬는다, 쉴 틈이 없었다.
지도부는 2월 20일경 다시 각 읍에 격문을 띄워 거사를 하게 된 뜻을 밝히고 거사에 참여를 독려하였다.
백성을 지키고 길러야 할 지방관은 치민의 도를 모르고 자신의 직책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다. 여기에 더하여 전운영이 창설됨으로써 많은 폐단이 번극하니 민인들이 도탄에 빠졌고 나라가 위태롭다.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차마 나라의 위기를 좌시할 수 없다. 원컨대 각 읍의 여러 군자는 한 목소리로 의를 떨쳐 일어나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자. (주석 3)
주석
1> 김삼웅, 『개남, 새세상을 열다』, 134~135쪽, 모시는 사람들, 2020.
2> 우윤, 앞의 책, 268쪽.
3>이복영, 『남유수록(南遊隨錄)』, 갑오 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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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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