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제연구소 출범 50주년 기념 및 고 백기완 선생 87년 인생의 바라지(중심)이자 민중사상의 원형 '버선발 이야기' 출간 이야기 한마당이 지난 2019년 4월 23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다.
권우성
'우리말 천태만상' 기획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백기완 선생님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2018년 여름 선생님께서 대학로 학림다방으로 나를 호출했다. 창가 자리, 학림다방 이충열 대표가 배려한 고정석에 앉아 계셨다. 두툼한 서류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고 입을 뗐다.
"자, 이거 읽어봐. 처음 보여주는 거야. 읽고 소감을 말해줘. 안 읽으면 총살감이야! 하-하."
서류봉투에서 A4용지로 정리한 원고의 첫 장에는 '버선발 이야기'라고 적혀 있었다. 버선발이 주인공이었다. 맨발, 즉 '벗은 발'을 뜻했다. 그 자리에서 첫 장을 읽었다.
썰렁하게 빈 방, 거기에 아무렇게나 쌓아둔 조짚 낟가리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납작납작 엎드린 집들이 즐비한 마을을 지나고 또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가파른 골짝으로 꺾어 들면 갑자기 무지 높다란 바윗돌, 그 외로운 그림자만을 이웃으로 한 코촉집(방이 하나뿐인 집) 하나가 느닷없이 불쑥한다.
오래된 문투였지만 고리타분한 게 아니라 신선했다. 홍명희 작가 '임꺽정'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났다. 낯선 말이 곳곳에 등장했지만,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입말체는 싱싱하고 구수하며 감칠맛까지 돌았다. 한 단어, 한 문장에서도 삶의 정서가 우러나왔다. 생경한 능동태는 글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것만은 아니었다.
"영어는 물론, 한자도 없어. 순우리말로만 쓴 글이야."
순도 100% 우리말로 엮은 책. 이게 가능할까? 세 번을 읽었고 매번 짧은 독후감을 선생님께 전했다. 영어는 물론 일본어 표기, 그 흔한 한자어도 보이지 않았다. 백 선생님의 마지막 책인 <버선발 이야기>(2019년 3월 오마이북 출간)를 세상에 내놓은 까닭이 있었다. 학림다방에서 마지막 독후감을 전할 때, 백 선생님이 힘주어 말했다.
"우리말(토박이말)이 영어에 묻혀 없어지는 것은 인류 문화를 죽이는 일이야. 무지랭이들의 말에는 민중들의 삶과 사상이 담겨 있어서 그래. 이 책을 낸 것은..."
[불통의 언어] 비치코밍? 워케이션? 슬리포노믹스?
하지만 우리말을 둘러싼 상황은 백 선생님의 뜻과는 달랐다.
- 부산 해운대서 비치코밍 페스티벌
- 공정위·소비자원 '홈코노미 제품 어린이 안전사고 주의'
- '워케이션 참여하세요' 하동군, 경남형 한 달 살이 시행
- 대구광역시, '대구 침장 특화산업 육성 슬리포노믹스 선도한다'
위의 기사 제목을 보면 말의 정신까지 찾을 겨를이 없다. 소통조차 어렵다. 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뜻 모를 외국어를 그대로 쓴 언론도 문제지만, 영어사전에도 없는 표어를 남발하는 공공기관의 책임도 크다. 국민 세금으로 벌인 사업인데, 국민들이 알기 힘든 말로 참여를 독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2019년 서울시 공공언어사용 실태 결과, 200개의 보도자료 중에서 외국어 남용으로 볼 수 있는 용어는 총 685개로, 조사 대상 전체 용어의 83%였다.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는 외국어 표현 3500개를 선정해 국민들의 이해 정도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 60% 이상이 이해하는 단어는 30.8%였다. 70세 이상은 6.9%만 이해했다.
[백기완] 빈 땅에 콩을 심듯 한 글자, 한 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