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전봉준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앉아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의 모습을 담은 좌상이 그가 처형당하기 전 갇혀 있었던 전옥서터에 세워졌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언제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김학규
전봉준은 고부관아를 점거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선포하였다.
1. 관속 중에 군수와 부동하고 탐학한 자를 처단한다.
2. 군기고를 열어 총 · 창 · 탄약을 회수한다.
3. 읍내의 청죽을 베어 죽창을 만들어 무기가 없는 자에게 주라.
4. 옥문을 열어 민란의 장두와 원통하게 갇혀 있는 백성을 석방하라.
5. 창고를 열어 빈민을 규휼하라.
6. 읍사를 정리하라.
전주감영은 고부봉기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발칵 뒤집혔다. 감사 김문현은 전봉준을 체포하고 난민을 효유키 위하여 병졸 40명을 변복하여 고부에 침투시켰다. 고부의 동학봉기군은 외부 출입자들과 식별하기 위하여 비표처럼 왼손 손목에 노끈을 매고 있었는데, 감영의 병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잠입했다가 붙잡히게 되었다. 이들 중 책임자 군위(軍尉) 정석진은 살해되었다.
이날 밤 동학군은 대오를 둘로 나누어 고부관아로 향했다. 예동에서 고부읍으로 통하는 길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천치(天峙)재의 서쪽으로 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영원(永元)을 거쳐가는 길이다. 모두 고부읍까지 20리 안팎이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주력부대는 영원길을 거쳐 고부관아로 들이닥쳤다. 농민들은 도중에 죽창을 만들어 꼬나들고 11일 (양 2월 14일) 새벽 동헌에 들이닥치니 조병갑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고 억울한 죄인들을 석방했다. 날이 밝자 일부 농민들은 말목장터로 나와 원한의 표적이었던 만석보로 몰려가 이를 허물고 예동두전(斗田)에 쌓아놓은 보세미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계속해서 말목장터에 자리를 잡고 백산으로 진출하여 진을 치기로 했다. (주석 7)
1811년 (순조 11) 평안도 농민들이 홍경래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10여 개 지역의 관아를 점령한 이래 80여 년 만에 고부지역 동학봉기군이 지방관청을 다시 점거한 것이다. 홍경래의 봉기군은 관군에 포위된 채 4개월을 버티다가 성이 폭파됨으로써 진압되고 말았지만 동학군은 달랐다.
그때 조병갑은 이미 도망쳤으므로 남아있던 관리들을 감금하고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기(화승총ㆍ검ㆍ창)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군수가 불법으로 징수했던 세미를 전부 농민에게 반환하고 다시 또 다른 징수의 구실이 되고 있던 만석보의 신보를 파괴하였다. 전봉준은 폭동에 참가했던 농민들을 결속시켜 대규모의 폭력투쟁을 전개하여 봉건통치자에게 큰 타격을 가할 작정이었지만, 반면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한 다수의 농민은 고부의 소위 유지들의 권유에 따라 25일에는 거의 전부가 해산하고 말았다. (주석 8)
전봉준은 일단 봉기군을 해산시켰지만, 그렇다고 혁명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보다 치밀한 전략의 수립이 요구되었고 동지들과의 협의와 역할분담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략적인 해산' 이거나 '삼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였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주석
5> 최기성,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운동연구』, 175쪽, 서경문화사, 2002.
6> 「석남(石南) 역사소설 - 박씨정기(定基)역사」, 『한국학보(71)』 부록, 8쪽, 일지사, 1993.
7> 이이화,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①」, 『역사비평』, 226~229쪽, 1989년 겨울호.
8> 『조선근대혁명운동사』, 76~77쪽,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편,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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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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