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서관학교 수료증 1961년 계훈모는 연세대 도서관학교에서 사서의 고급 훈련 과정(특수 과정)을 수료했다. 이 수료증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모두 한국 도서관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당시 연세대 총장 윤인구는 부산대 초대 총장 시절, 건축가 김중업을 초빙해 효원도서관(지금의 박물관)을 건립했다. 한국도서관학교장 민영규는 연세대 도서관장과 한국도서관협회장을 지냈다. 크로슬린은 연세대 도서관학과 초기 외국인 교수 중 한 명이다.
계한경
재동보통학교와 보성중학교를 다닌 계훈모는 경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부친 계연집도 보성중학교를 6회로 졸업했다.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을
촉발한 이기붕 부통령도 보성 6회 졸업생이다.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박봉석과 함께, '국립도서관' 이름을 지은 최승만도 보성 6회 졸업생이다. 1945년 당시 최승만은 미군정청 문교부 교화과장이었다.
경성상업학교를 졸업한 계훈모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본대학 제3상업학교를 거쳐, 1943년 9월 일본전수대학 전문부 경제과 3년 과정을 졸업했다.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계훈모는 자신의 일본 유학 시절을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엉터리 학교를 엉터리로 다녔을 뿐."
조선으로 돌아온 계훈모는 1943년 11월부터 경성부와 동신직물에서 12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그는 문용자와 결혼했다. 계훈모는 천도교 교령 이종린의 주례로,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55년 9월 8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이직한 계훈모는, 1973년 8월 23일 55세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18년 동안 근무했다. 계훈모가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어떤 계기로 도서관에 몸담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의 도서관 이직으로, 훗날 한국 언론 분야는 최고의 '사서'와 '연구자'를 얻는다.
계훈모는 1968년 7월부터 16개월 동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도서관에서 일했고, 나머지 기간은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근무했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그는 '수서' 업무를 담당했다. 서기(書記)로 근무하다가, 1959년 11월 18일부터는 사서(司書)로 일했다.
서울대학교는 1975년부터 관악 캠퍼스 시대를 맞았다. 그는 관악 캠퍼스를 경험하지 못하고, 동숭동 시절 서울대 도서관에서 일했다. 계훈모가 일한 도서관 건물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지은 바로 그 건물이다. 가회동에 살았던 그는 동숭동 서울대 도서관까지 늘 걸어 다녔다. 점심 끼니도 자주 걸렀다. 박봉이었던 탓에 차비와 식비를 아끼기 위함이었다.
계훈모는 서울대 도서관으로 이직하기 전에, 도서관에서 근무하거나 도서관학 공부를 하진 않았다. 서울대 도서관에 근무하던 1961년, 그는 연세대학교 부설 한국도서관학교 특수과정(1년 과정)을 이수했다.
사서 계훈모, 연구자 계훈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