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간 건 산수유, 산수유는 맛있다. 결론은 산수유만 맛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노일영
우리 연구회의 회원들 모두 겉보기와 달리 수줍음이 많은 은둔형 외톨이였다. 그들은 가슴이 두근두근 마음이 울렁울렁 얼굴이 붉어진, 당신만 아세요, 육십 일곱 살이었다. 그들을 보려면, 가만히 가만히 오세요, 요리조리로, 언제나 살벌한 산수유나무 아래로, 아마도.
함양에서 사는 사람들 모두 다 자신의 혈연·지연·학연·막걸리연의 거미줄 안에 엮여 있다고 늘 부르짖던 박 영감도 고작 마른 산수유 4개를 판매했다. 실망한 티를 안 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곰팡이처럼 저절로 피는 썩소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썩소의 다양한 종류 중 발효소(笑)와 달리 부패소(笑)는 의지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불수의근의 지배를 받는 모양이었다.
"(돌겠네) 44개가 아니라 4개요?"
"이사장한테 면목이 없구만."
"······."
갑자기 중평댁이 대변인이라도 된 듯 나섰다.
"이 양반 아는 사람들 이제는 다 무덤에서 산다 아이가. 4개라도 팔았으먼 무시무시하게 마이 판 기라."
무시무시? 중평댁을 연달아 두 번 무시해버리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됐고요, 음복주를 마시며 추모해야 할 친구 이외에 박 영감의 술친구만 해도 어마무시하게 많다는 걸 내가 다 알거든요. 실적현황표를 보니 설렁설렁 영업을 뛰며 21개를 판 내가 판매왕이었고, 20개를 판매한 작업반장이 내 뒤를 맹렬히 뒤쫓고 있었다.
반장이 마을 회의를 소집했다. 생산 과정에서는 비록 위세가 많이 꺾였지만, 판매 실적으로 따지면 회의를 소집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무산댁과 우 이사를 비롯한 실용론자들 모두 반장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을 아꼈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는지, 반장의 표정과 말투는 산수유 작업을 처음 시작하던 시점으로 초기화되어 자신감이 넘쳐났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러지 말고, 산수유차 좀 마시고 다들 불끈불끈 힘을 내자구요. 그리고 두 분 위원장님들은 대체 뭐 하는 겁니까. 보자, 무산댁 형수가 1개 팔고, 우 이사님은 2개 팔고. 아, 이래서야 어디 일하신 분들에게 최저임금이라도 지급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분발 좀 부탁드립니다."
소평댁의 비밀
19개를 팔아 판매 랭킹 3위였던 소평댁에 관한 비밀을 하나 털어놓아야겠다. 소평댁은 쟁의대책위원회의 핵심 멤버로, 정보수집팀 팀장이었다. 평소에 무산댁과 함께 밤마다 술을 홀짝홀짝 마시던 친분 때문에, 위원회 내부에서는 낙하산 인사라는 논란이 있었지만, 사실상 마을에서 모든 소문이 취합되고 확대 재생산되는 곳이 소평댁의 입이었으므로, 그녀는 팀장으로서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소평댁이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마을회관 안으로 스며든 건 파업 당일 오후 3시경이었다. 그녀가 정보수집팀 팀장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까지 파업 중단 통보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소평댁은 회관으로 들어오자마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분주하게 일을 돕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손자병법 제13편 용간(用間)을 보면, 간첩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그중에서 소평댁이 사간(死間)인지 아니면 생간(生間)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사간은 죽음을 각오하고 적국에 잠입해서 거짓 정보를 유포하는 간첩이고, 생간은 적의 동정을 살펴서 보고하는 간첩이다.
파업 때문에 인원 부족으로 외부 작업을 할 수 없어서, 쟁의대책위원회에서 사측(社側)이라고 규정한 이 이사와 남편, 나와 반장, 중평댁과 박 영감 6명 모두는 마을 회관에서 기계조의 일을 하고 있었다. 채반 위에 쏟아진, 씨가 빠진 산수유 열매를 펼치며 시원찮은 열매를 골라내던 소평댁이 입을 열었다.
"우 위원장 그 새끼 그거 빨갱이 아이가? 테레비에서만 파업인동 뭐시긴동 봤는데, 내가 그 무서븐 거를 할라 카이까네 간이 다 오그라드는 기라. 그런 거는 빨갱이들만 하는 짓 아이가, 맞제?"
아하, 사간(死間)이구나! 회관 안에 있던 사람들 누구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평댁은 우리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바쁘게 손을 놀렸다.
"내가 여 온 거는 비밀이다, 알것제? 내는 우 위원장이 입에 달고 사는 파업이라는 말이 듣기도 싫은 기라. 파업이라 카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빨갱이가 된 거 같거든. 그라고 이거 해가꼬 품삯을 받든 아이믄 협동조합인동 마을기업인동 그거 해가꼬 뭉티기로 품삯을 받든, 나는 상관도 없는 기라. 내는 기양 내 손주 새끼한테 게임기 그거 사주믄 된다 아이가."
"아줌마, 게임기 그거 애들한테 별로 안 좋아요."
"우리 이사장! 그노무 새끼가 그거를 좋아하믄 그걸로 다 된 기라. 내가 트로트 조타꼬 손주 놈한테 트로트 가수 하라 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