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시전 풍경다양한 시전들이 몰려있던 운종가의 모습
한국콘텐츠진흥원
은국전은 조정에 세금을 내는 시전의 하나로 술을 빚는 사람들에게 누룩을 공급하는 일종의 상점이었다. 얼마나 많은 누룩들이 술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는지 중종대에는 도성의 각 시장에 누룩을 파는 데가 7, 8곳이 있어 하루에 거래량이 7백~8백 문이 되며, 그 누룩으로 술을 빚어 쌀 소비가 천 여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금을 내지 않는 난전도 많았기에 실제 누룩생산량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누룩의 사용은 근대화 시기까지 계속적으로 증가한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양조 현황을 정리한 조선주조사에 따르면, 1924년 전국에 28,206개의 누룩 제조장이 있었고 면허 인원은 37,759명, 그 공장들이 만들던 누룩 양은 45,103톤이었다. 당시에는 각 지역에 소규모의 특색 있는 누룩 제조장이 있었다. 누룩 제조장이 많은 것은 다양한 술들이 생산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 식민지 시기에 세금을 걷기 위한 일본 입장에서 조선의 자가제조 및 판매용 누룩의 품질이 고르지 못해서 술 품질개선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자가제조가 많다 보니 밀주의 원료로 제공될 수 있다는 정부의 판단으로 각 도에서는 누룩 제조장을 통합하기로 방침을 수립한다.
1923년경부터 경북을 시작으로 충북, 경기, 전북, 전남 등의 각 지방 별로 집약 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개량 곡자의 제조를 권장하였다. 경상남도의 경우 1927년 2,466곳의 누룩 생산 공장이 1929년에는 786곳으로 감소하였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누룩 생산 공장의 감소가 일어났으며 우리 누룩의 다양성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독립 이후에도 입국이라는 새로운 단일균을 이용한 흩임 누룩 제조방식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전통 누룩으로 만든 술들은 설자리를 잃어 버렸다. 누룩의 소비가 줄어들면서 2,000개 이상 되던 누룩 제조회사가 현재 3곳 정도로 줄어들었다. 몇몇 작은 업체도 있지만 소량 생산에 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