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의 경전인 <동경대전>.
안병기
모든 종교에는 '경전(經典)'이 있다. 원래는 성인ㆍ현인이 지은 책이나 글 또는 불교의 교리를 적은 책을 일컫고, 유교의 교리를 지은 책을 경권(經券)이라 한다. 기독교에서는 성경이라 부른다.
대원군이 최제우를 처형할 때 조정은 그가 남긴 설법집을 비롯하여 많은 자료를 압수하여 불태웠다. 더 늦기 전에 남은 자료를 모으고 생존한 측근들의 기억을 되살려 기록하는 일이 최시형의 과제였다. 뒷날 "동학 교리의 체계화, 동학 조직의 재건과 지역적 기반의 확대, 경전의 집성, 제도와 의식의 확립, 정기적 수련 제도의 실시를 통한 지도자의 양성 (주석 9)등이 그의 업적으로 평가 받는다.
여기서는 '동학교리의 집성'과 '경전의 집성'에 대해 살펴본다. 이필재의 '영해봉기' 이후 다시 관의 추적이 강화되자 최시형은 더 깊은 산골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는 이어 제자 강수(姜洙)만을 데리고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동굴 속에 살면서 14일을 나뭇잎으로 연명했다. 어느날 나무꾼의 도시락을 얻어먹었고 계속 나무꾼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이었다. 이때 그의 맏아들은 잡혀가 장사(杖死)되었고 얼마 뒤에는 그의 부인과 작은아들마저 모진 고초를 겪은 끝에 병사했다. 그의 혈통이 끊어짐은 물론, 혈혈단신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지하에서의 포덕은 결코 그치지 않았다." (주석 10)
그는 포덕과 함께 동학의 경전 간행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동학 내부에는 그가 이미 1865년에 "구송(口誦)을 통해 제자들로 하여금 스승의 가르침의 글들을 받아 쓰게 하였지만, 이때 받아 쓴 글들은 필사로 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해월신사는 이를 보다 분명하게 확정하기 위하여 '도적(道跡)' 및 '경전(經典)'을 대대적으로 판각하여 간행하고자 위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주석 11)
조선조 말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도탄에 빠진 민중에게 한가닥 기댈 언덕이 되고, 이어서 원민과 항민을 호민으로 일깨워 반봉건ㆍ척왜척양의 근대민중혁명의 주역이 되고, 다시 3ㆍ1혁명의 중심이 된 동학의 대표적인 경전은 교조 최제우가 짓고 최시형이 간행한 『동경대전』이다.
동학관계 사서에는 이외에 『용담유사』와 최제우의 출생에서 득도와 순도 그리고 최시형이 『동경대전』을 간행한 1880년까지의 동학역사를 담은 『최선생문집 도원기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