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혁명가 한빈한빈의 사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수감 과정에서 촬영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한빈의 모습을 일제의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은 한빈이 다부지고 형형한 눈빛의 사회주의 혁명가였음을 알려준다.
국사편찬위원회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과 북조선신민당이 합당하면서 '북조선노동당'이 탄생했다. 8월 30일 열린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때 한빈은 43명의 중앙위원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당시 그의 서열은 39위였다. 연안파에서 한빈의 위상을 생각할 때, 그의 서열은 의아함을 갖게 한다.
1946년 10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이 출범하자, 한빈은 초대 총장 김두봉과 함께 부총장을 맡았다. 총장이 상징적인 자리라는 것을 감안하면, 한빈이 김일성대학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모택동대학, 이승만대학이 없던 시절, '북조선종합대학'이 '김일성대학'으로 명명된 이유는 뭘까? 옌안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학철은 부총장 한빈에게 직접 들은 사연을 회고로 남겼다.
"아 글쎄 학교 이름을 짓는 회의를 하는데 회의를 막 시작하자마자 아첨꾼 하나가 얼른 나서 가지고 '김일성대학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니 어떡해. 일단 말을 낸 이상은 아무도 안 된다고 반대하기는 어려운 노릇이거든. 그래 그대로 돼버린 거지."
1947년 2월 20일 북한은 초대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237명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 명단에 한빈은 들어 있지 않다. 1948년 9월 9일 출범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에서도 한빈은 눈에 띄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조선신민당 부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을 맡았던 한빈은 연안파 중에서도 '거물'에 속했다. 일제강점기 해외와 조선을 오가며 쌓은 그의 명성과 투쟁 경력은 김일성에 비해서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북조선에서 중용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김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최창익은 내각 부수상을 맡았고, 그와 동갑인 무정은 조선인민군 포병 부사령관을 맡았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허정숙이 조선로동당 선전문화상을, 그보다 7살 어린 김창만은 조선로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을 맡았다.
남북한 국가도서관에서 펼쳐진 '묘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