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차별금지법인가>를 쓴 이주민 미국 변호사
이주민 변호사 제공
차별금지법 국민동의청원이 지난 15일 10만 명을 넘으면서 관련 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자동 회부됐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 법안에 이어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여당 의원 20여 명도 지난 16일 '평등에 관한 법률안(평등법)'을 발의했다. (관련기사 :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국민동의청원 10만 명 달성 http://omn.kr/1twzv)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지만, 낙관하기는 어렵다. 지난 2007년과 2013년, 2017년 세 차례 시도 모두 일부 보수 기독교계의 조직적 반발과 '사회적 합의'란 정치적 명분으로 좌절됐다.
때마침 미국 한 로펌에서 활동하는 미국 변호사가 쓴 책 한 권이 이 첨예한 '전선' 한복판에 떨어졌다. <왜 차별금지법인가>(스리체어스)라는 책에서 반대론자들의 잘못된 주장과 그에 따른 오해들을 조목조목 지적한 이주민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렇다 할 국내 활동도 없었고, 인권변호사도 아닌 '평범한' 30대 변호사가 고국의 논쟁에 뛰어든 이유가 궁금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7일 오전 11시(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이 변호사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미국 변호사가 '차별금지법 논쟁'에 뛰어든 이유
- <왜 차별금지법인가>는 100쪽 남짓 짧은 분량이지만,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주요 쟁점들을 거의 빠짐없이 담고 있다. 어떤 계기로 이 책을 쓰게 됐나. 입법청원 달성도 예상했나.
"지금 같은 상황은 전혀 예상 못했다. 2020년 출판 제안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내가 남성이고 이성애자인 데다 차별 피해자들을 돕는 운동가도 아니어서 이런 책을 쓰기엔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도 차별금지법에 대한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차별에 대한 문제 의식은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는 분들, 심지어 반대하는 분들이라도 법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하려고 썼다. 나도 차별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혜택 받은 사람으로서 한때는 차별금지법의 중요성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논조의 책을 쓰기에 더 좋은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 미국은 이미 1964년에 우리 차별금지법과 비슷한 민권법을 만들었다. 그런데도 조지 플로이드 사건 같은 흑인 인종 차별이나 아시아계 혐오 같은 차별 행위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답답한 것도 이런 부분 때문이다. 법제화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민권법도 1964년 만들어져 미국 흑인들의 학교, 식당, 버스 이용이나 투표권 등 제도적인 부분은 많이 해소됐지만, 법을 적용하는 건 결국 인간이다.
검사든 판사든 변호사든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편견이나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다. 민권법이 없었던 지난 200여 년 동안 흑인은 열등한 사람으로 교육받고 자라온 사람들이 민권법이 생겼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모두 법을 배우고 적용하고 (차별행위의) 문제점을 깨닫고 공부하면서 인식이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법의 선언적 효과는 인식이 바뀌는 시작일 뿐이다. 차별금지법이 기적적으로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성소수자나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그다음 날에도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차별금지법을 적용하고, 국민이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차별은 잘못됐구나', '(혐오차별 행위를) 조심해야겠다' 배우면서 편견이 개선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별금지법 찬성하는 적극적인 다수 조직해야"
- 2020년 6월 국가인권위원회 국민인식조사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찬성 여론이 88.5%로 거의 90%에 달했다. 보수 기독교계 반대가 심했다고는 해도, 이렇게 찬성 여론이 높은데도 법안이 통과되지 못한 이유가 뭐라고 보나.
"적극적인 소수와 소극적인 다수가 맞붙으면 정치에서는 결국 적극적인 소수가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소수가 입법 과정에 영향을 많이 미쳐 결국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건 사실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차별은 나쁜 일이라고 공감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성이 없을 뿐이다. 이 분들을 차별금지법을 요구하는 정치 세력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이 책을 쓴 목표다."
- '극단적 반대론자보다 다수인 온건주의자들의 침묵이 더 큰 장애물'이라는 마틴 루서 킹 목사 말을 인용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 보수 기독교계 반발이 심한 지금 한국 상황도 비슷해 보인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소수의 인종 혐오적인 백인보다 다수의 온건하고 방관하는 백인들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인류 역사상 어떤 비극도 다수의 방관 없이 이루어진 사례는 거의 없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의를 가진 동물이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 대해 대다수의 적극적 동의를 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수의 적극적인 차별이나 혐오 감정이 다수의 방관과 합쳐졌을 때 사회 전체를 옭아매는 제도적 차별이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