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교조 최제우의 포교 가사집 <용담유사>.
안병기
여기서 말하는 '악질'은 각종 전염병은 물론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가져온 정치사회적인 질환과 서양세력의 침략 등을 포함한다. 임진ㆍ병자 양란을 겪고 거듭되는 세도정치로 낡고 병든 봉건질서가 기울고 사회적 혼란상이 일고 있던 시기에 최시형은 태어났다.
최시형은 1827년 3월 21일(양 4월 16일)에 외가인 경주 동촌 황오리(현 황오동 229번지)에서 아버지 최종수(崔宗秀, 1804년 6월 22일~1841년 10월 15일)와 어머니 월성 배씨(?~1832년 4월 22일) 사이에 출생하였다.
해월은 신라 말의 대석학인 고운 최치원의 30대손이며, 중시조인 여말의 충신 관가정(觀稼亭)의 16대손이다. 또 그의 8대조는 조선조 선조대(宣祖代)의 당상관인 통정대부, 예조참의를 지낸 최무민(崔武敏)이었으며 5대조까지 연이어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낸 경주의 명문가이었다.
특히 해월의 증조부 최계동(崔啓東)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몇 차례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남인 출신인 관계로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원래 계동은 도학과 명리학에 밝아서 경주의 산천을 벗삼아 고적과 역사, 풍수지리 연구를 하면서 산림처사로 평생을 불우하게 보냈다. (주석 2)
최계동은 슬하에 5형제를 두었는데 그의 아들 규인(奎仁)이 최시형의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종수(宗秀)ㆍ한수(漢秀) 두 아들을 두고 35세에 세상을 뜨면서 가세가 기울어졌다.
해월의 아버지 종수는 곤궁해진 생활고 속에서도 그의 첫 아들이자 최씨가문의 종손인 해월에게 가문의 법도와 조상들의 훌륭한 내력을 가르쳤다. 한편 해월을 증조부 계동의 학문을 이어 갈 선비로 키우기 위해 김계사(金桂史) 등과 함께 늦은 나이인 10세 때, 경주의 서쪽 선도산 밑에 자리잡은 서악서원에서 학문에 입문케 했다.
김계사는 해월보다 5살 아래로 경주지역의 명문장이며 김범부의 스승이기도 하다. 김범부는 네 살부터 열세 살까지 김계사 선생에게서 한문칠서 등을 수학하였다고 한다. 김범부는 김계사에게서 해월과 수운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주석 3)
어릴 적의 이름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인데 뒷날 시형(時亨)으로 개명하였다. 해월(海月)이란 호는 언제부터 사용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는데,「해월 최시형의 약력」에는 "1863년(37세) 7월 23일에 수운 최제우로부터 해월당(海月堂)의 도호를 받고 북접주인으로 임명. 같은 해 8월 14일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전수."(주석 4) 라 하였다.
6세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영일정씨(鄭氏) 슬하에서 자라다 15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계모가 떠나가고 누이동생과 함께 먼 친척집에서 성장한다. 유년기는 영일군 신광면 터일(현 기일동)에서 보냈다.
조실부모한 최시형은 역경 속에서도 건장하게 자라서 17세에 옹금당 마을에서 한지를 만드는 조지소(造紙所)의 일을 했다. 여기서 기술을 배우며 인근 지역 거래처에 한지를 날라다 주는 등의 일을 하면서 2년간 살았다. 이 시기 그는 세상 물정을 터득하고, 19세에 흥해의 밀양손씨(?~1889년 10월 11일)와 결혼하여 터일마을 안쪽의 음금당 마을과 흥해의 마복동에서 살았다.
해월의 누이동생은 마북동 조지공장에 있을 때 경주 서촌의 종숙부 소개로 임익서(林益瑞)에게 출가시켰다. 이 임익서는 해월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여 수운의 지도를 받았고 후일 수운이 대구 장대에서 순교했을 때 해월을 대신하여 그의 시신을 경주 용담정까지 운구하여 장례를 치른 바 있는, 초창기 동학조직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주석 5)
해월이 여기서 여섯해를 사는 동안에 그곳 지방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집강(執綱)으로 뽑혔다. 오늘날의 면장이나 이장에 해당하는 집강으로 천거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그의 공명정직하고 청렴결백한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려서부터 먼 일가에 한 몸을 의지하고 살아야 했던 그가 이제 떳떳하게 마북이라는 한 마을을 대표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어려서부터 스승의 가르침이나 가정교육도 정상적으로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자랐다. 그러나 남달리 튼튼한 몸에 부지런하고 마음씨마저 착하고 어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과 믿음을 받을 수 있었다. (주석 6)
주석
1> 『동경대전(東經大全)』, 「포덕문」
2> 최정간, 『해월 최시형가의 사람들』, 41쪽, 웅진출판, 1994.
3> 앞의 책, 44쪽.
4> 부산예술문화대학 동학연구소 엮음, 『해월 최시형과 동학사상』, 296쪽, 예문서원, 1999.
5> 최정간, 앞의 책, 51쪽.
6> 이세권 편저, 『동학사상』, 94쪽, 경인문화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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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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