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회담을 가진 김대중씨와 유진산씨. 1972.8.25
연합뉴스
그 같은 시세를 등에 업은 김영삼의 '쿠데타'에 유진산은 당황했다. 그가 당황했다는 점은 김대중과 이철승의 가세로 40대 기수론이 위력을 더해가자 그가 비합리적으로 반응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후배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상황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는 후생가외(後生可畏)란 말처럼, 그는 김영삼 발 변화 앞에서 가외(可畏)의 정서에 매몰되어 차분하고 합리적인 대응을 보여주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유진산이 자신도 대권후보가 될 자격과 역량이 있다고 판단했다면, 국민과 당원을 상대로 자신의 경쟁력을 보여주고 40대 기수들과 경쟁하는 편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만 치중하는 측면이 있었다. 40대들과 경쟁하지 않고 그들을 포용한다는 외형을 만드는 데 좀 더 관심을 기울였다.
김영삼 '쿠데타' 2개월 뒤인 1970년 1월 26일 임시전당대회에서 대표위원이 된 그는 위 논문에 정리된 바와 같이 '나는 40대들과 경쟁할 생각이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후보로 나서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세대교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40대 기수들을 "구상유취(口尙乳臭)의 정치적 미성년자들"로 폄하했다. 40이 넘은 사람들한테 젖비린내가 난다고 깎아내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경쟁력을 보여줘야 했지만, 그는 경쟁한다는 인상도 주지 않으려 했다. 실제로는 40대와의 경쟁이 시작됐는데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에 대한 여론이 싸늘해지자, 그는 이런 행동을 보였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의 이야기다.
자신이 출마할 기회가 점점 멀어지자 유 총재는 다시 세 명 중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는 지명권을 달라고 했다.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나흘 앞둔 9월 25일에 나와 이철승, 김영삼씨를 상도동 자택으로 불러 이 같이 제안했다.
40대 기수들과의 경쟁을 피하고 그들 중 하나에 대한 지명권을 행사하고자 했던 것이다. 제왕적 총재의 권위를 갖고 40대 기수들을 끌어안는 모습을 연출하고자 했다. 민주주의 정당에 맞지 않은 꿈을 꿨던 것이다.
그때 당내는 크게 김영삼씨가 포함된 진산계가 주류였고, 나와 정일형·이재형계는 비주류였다. 유 총재는 같은 야당이지만 나와는 계보가 다를 뿐 아니라 걸어온 길과 정치노선이 달랐다. 유 총재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다. 김영삼·이철승씨는 유 총재의 지명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유 총재가 나를 지명하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민주주의와 당원의 총의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40대의 기세를 당할 수 없게 된 유진산은 같은 계파인 김영삼을 지원하고 싶어했다.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전날인 1970년 9월 28일에는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김대중의 정면 거부에 더해 이철승의 이탈로 김영삼이 아닌 김대중이 선출되는, 그의 입장에서 최악인 상황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진산은 조직력과 자금력에서는 40대 기수들을 앞질렀기 때문에 그 일이 있은 뒤에도 1974년까지 당권을 지켰다. 그 뒤에도 그는 진산 파동이라는 과오를 또 한번 저지른다. 그러다가 유신체제에 저항하던 중인 1974년 4월 28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진산은 40대 돌풍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포용하지도 못했고 경쟁하지도 못했다. 항일투쟁과 반(反)이승만 투쟁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그는 언론 파동과 진산 파동이라는 흠집과 더불어 40대 기수론에 대한 부실 대응으로 또 하나의 흠집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