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 법원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연합뉴스
위안부 및 강제징용에 관한 최근의 퇴행적 판결들에 경종을 울리는 법원 명령이 나왔다.
지난 1월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34부(김정곤 부장판사)가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는데도, 일본 정부는 판결을 이행하지도 않고 판결에 항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강제추심을 목적으로 한국 내 일본 재산을 공개해달라며 재산명시 신청사건(2021카명391)을 법원에 청구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법 민사51단독 남성우 판사는 "채무자는 재산 상태를 명시한 재산목록을 재산 명시 기일에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승소 피해자들이 강제추심을 할 수 있도록 한국 내 일본 재산의 공개를 요구한 것이다. 이 명령은 지난 9일 내려졌고, 15일 자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이번 재산명시 신청사건의 재판부는 재산목록 제출 명령을 내리면서, 4월 21일의 위안부 각하판결 및 6월 7일의 강제징용 각하판결에 담긴 오류를 짚었다. 1월 8일 위안부 승소 판결 뒤에 있은 문재인 대통령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지지 발언(1월 18일) 및 외교부의 '정부 차원의 불개입' 표명(1월 23일) 이후로 나온 일련의 판결들에 담긴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중대한 인권침해는 주권면제 예외
각하판결을 내린 재판부가 내세운 논리 중 하나는 주권면제(국가면제)다. 주권국가인 일본을 타국 법정에 세울 수 없으므로 피해자들의 청구를 물리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와 관련해 이번 사건 재판부는 "국가에 의해 자행된 살인·강간·고문 등과 같은 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행위에 대해 국가면제를 인정하게 되면, 국제사회의 공동의 이익이 위협받게 되고 오히려 국가 간 우호 관계를 해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 점, 어떤 국가가 강행규범(반드시 지켜야 할 국제규범)을 위반하는 경우 그 국가는 국제공동체 스스로가 정해놓은 경계를 벗어난 것이므로 그 국가에 주어진 특권은 몰수됨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위안부 피해는 청구권협정과 무관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및 강제징용 문제가 해결됐고 그에 더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종결됐다고 주장한다. 6월 7일에 강제징용 각하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의 방법으로 그 국내법 규정을 원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제27조를 내세워 '한국 국내 사정을 근거로 청구권협정을 거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는 청구권협정에 구속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번 재판부는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소구(訴求, 청구권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있었고, (위안부 피해자인) 채권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 성격을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과 달리 볼 수 없으므로 채권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소구할 수 없거나 강제집행을 신청할 수 없는 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청구권협정은 위안부 피해와 무관하므로 이와 관계없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비엔나협약 제27조에 반하지 않아
이번 재판부는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비엔나협약 위반으로 볼 수 없다는 점도 밝혔다. "2015년 위안부 합의는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정부 간 합의에 불과해 조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비엔나협약의 위반 여부와는 더욱 관계가 없다"고 말한 부분이 그것이다.
강제징용 각하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비엔나협약 제27조를 과도하게 확대 해석해 "비엔나협약 제27조에 따르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식민지배의 적법 또는 불법에 관해 상호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일괄해 이 사건 피해자들의 청구권 등에 관해 보상 또는 배상하기로 합의에 이른 조약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고',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는 청구권협정에 구속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 재판부는 일본 정부의 재산을 강제집행하려는 채권자들의 행위가 비엔나 협약 제27조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채권자들의 강제집행 신청이 비엔나협약 제27조 전단(전반부)에 반하는 것으로도 볼 수 없"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청구권협정이 식민지배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하므로 이 협정에 의존하지 않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비엔나협약 위반이 아니라고 밝힌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일협정이 있었는데도 피해자들이 이 법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면 비엔나협약 위반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사건은 그와 무관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