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의 퇴진을 보도하는 CNN 뉴스 갈무리. 37년 간 통치해 '최악의 독재자'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지난 2019년 9월, 95세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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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정권교체를 원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간 잔인했던 독재로부터의 해방과 공정한 선거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짐바브웨의 불법선거의 역사는 길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1983년~1987년까지 자행된 구쿠라훈디 대량학살사건으로, 짐바브웨군은 당시 무가베의 정적인 짐바브웨아프리카인민연맹당 (ZAPU)과 지도자 응코모의 지지기반이었던 마타벨레랜드 및 미드란드지역의 은데벨레 부족을 대량학살했다. 생존자들은 무가베의 지시를 받은 5여단특수부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생매장하거나 불태워 죽이는 등 잔인한 학살을 저질렀다고 증언했다.
'국제인종학살연구협회'(IAGS)는 최소한 2만여 명이 희생된 이 사건을 인종청소라고 정의했으며, 역사학자 스튜아트 도란 박사는 가디언 기고 글에서 이 학살의 주요동기는 집권여당의 1985년 선거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1987년 12월 22일 ZAPU와 Zanu당의 대표들은 통합협정을 체결해 무력대결을 멈추고 Zanu-PF당(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연맹 - 애국 전선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Patriotic Front)으로 합당을 결정했다. 이날은 현재 국경일이지만, 다수 유족은 현재진행형인 정부의 탄압과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 전직 무가베 대통령은 이 사건을 "광란의 순간"이었다고 표현했지만 실제로 유족에게 공식 사과는 거부했다. 현 음난가그와 대통령도 대학살 당시 국가안보부 장관이었지만 아직 공개 사과한 적이 없다.
닐손 감독의 <데머크래츠>(2014년)가 잘 보여주듯, 짐바브웨의 첫 민주적 헌법의 탄생은 이런 무가베정권의 인권탄압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개입의지가 그 배경이었다. 경제위기의 한복판이었던 2008년 3월 치러진 대선, 국회의원선거에서 여당 ZANU-PF는 1980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참패했고 모건 창기라이 (Morgan Tsvangirai)가 이끌던 야당, 민주변화운동 (MDC)이 최다 의석을 확보했다. 대선에서도 야당 후보 창기라이가 47.8%표를 득표했으나 절대 다수표를 얻지 못해 3개월 후 결승전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무가베와 보안 세력이 야당 정치인, 활동가,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살인, 구타, 고문 등 폭력을 행사하자 창기라이는 자진해서 사퇴하고 무가베는 대통령직을 유지하게 된다. 국제앰네스티 2009년 보고서에 의하면, 3월 선거 이후 최소 180명 사망, 고문과 구타로 9000명 이상 부상, 약 2만 8000명이 자택에서 강제퇴거를 당했다. 여러 현지 소식통은 사망자 수치를 최소 4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아울러 640만 투표등록자 명부 가운데 약 백만 명은 이미 사망했거나 이주했고, 63개 선거구 이상에서 현 거주자보다 투표 등록인 수치가 많았다는 사실 등 여러 불법행위가 밝혀지자 국제사회는 이 선거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야권 모건 창기라이 후보와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함께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몇 년간의 힘든 협상 끝에 대통령의 연임을 2번까지만 허용하는 헌법이 제정되었고 2013년 3월 국민투표에 의해 헌법으로 채택되었다.
상대 세력에 고문 행사한 전직 대통령... 독재 극복하는 과정을 영상에 담았다
짐바브웨 정부는 이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담은 영화 <데머크래츠>의 배급을 불허했고, 카밀라 닐손 감독은 한동안 짐바브웨에 입국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감독은 이에 맞서 현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수년간의 싸움끝에 배급허가를 받아냈다. 하지만 신작 <프레지던트>가 설사 짐바브웨에서 배급된다고 해도, 신변의 위협으로 현지 홍보 활동은 꿈도 꾸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는 짐바브웨에서 두 편 모두 무료배급을 추진 중이다.
카밀라 닐손 감독은 뉴욕대에서 '관찰자적 다큐멘터리' 제작방식을 활용해 인류학을 연구하는 비주얼인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유엔 기구인 유니세프및 유네스코에서 미디어 컨설턴트로 일한 경력이 있다. <프레지던트>에서는 아카데미 최고 다큐상 후보에도 두 번 올랐던 시느 쇠렌슨(Signe Byrge Sørensen)과 함께 작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