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동 희망교회희망교회는 평생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목회활동을 실천하고 있는 감신대 출신의 목사 정명기가 1975년 10월 19일 사당3동(산24-20) 판자촌에 가게 두 개를 터서 세운 11평 크기의 교회였다. 이곳에서 1978년 고려대생들의 '78 민중선언' 유인물도 제작되었다.
도시빈민선교 현장보고서
유신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던 1978년 9월 14일 고려대에서는 3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유신철폐", "독재타도"의 구호를 높이 외치며 교문 밖 진출까지 시도할 정도로 강력히 진행된 고대생들의 이날 시위는 이른바 '78 민중선언' 사건으로 불린다. 이날의 시위로 고대생들은 52명이 연행됐고, 그중 7명이 구속됐다.
고대생들의 이날 시위는 3년여의 오랜 공백을 깨고 벌인 의미 있는 반유신 시위였다. 고대생들은 강종건(고대 법학 3) 등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민주화' '자유화'를 구실로 국가변란을 획책했다는 '학원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이 발표된 1975년 11월 22일 이래 오랜 기간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유신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조작 사건이었다. 실제로 강종건 등 이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레드 콤플렉스가 강했던 당시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조차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78년 9월 14일의 대대적인 '78 민중선언' 시위는, 고대생들이 그러한 압박에서 벗어나 다시금 반유신 투쟁의 선봉에 설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의 시위를 주도한 이혜자(생물학과 74), 천상만(행정학과 75), 오상석(경제학과 76)이 배포한 '피끓는 고대 학우여! 즉시 대강당으로 모이자! 78 민중선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제작한 곳이 바로 사당3동 달동네에 있던 희망교회였다.
유인물 제작을 맡았던 천상만에 따르면, 원래는 새문안교회 구로동야학에서 유인물을 제작하고 잠이 들었는데, 교실 전체가 물바다가 되면서 유인물도 다 젖어 못쓰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 시위 결행일도 늦추고 사당3동 희망교회에서 유인물을 다시 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인물을 제작하는 일은 지금과 같이 컴퓨터와 프린터로 하는 시대가 아니었으며, 가리방(철판)에 원지를 대고 긁어서 이를 잉크와 로울러를 이용하여 종이에 인쇄하는 작업을 직접해야 하는 고단한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고대생 천상만이 '78 민중선언' 유인물을 제작했다는 사당3동 희망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희망교회는 평생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목회활동을 실천하고 있는 감신대 출신의 목사 정명기가 1975년 10월 19일 사당3동(산24-20) 판자촌에 가게 두 개를 터서 세운 11평 크기의 교회였다. 정명기는 이곳에서 1980년까지 목회활동을 하면서 부인 강명순과 희망유치원, 새희망신용협동조합 등을 함께 운영했다.
애석하게도 사당3동의 희망교회는 그러나, "교회설립 5년 만에 판자촌이 헐려 연립주택이 들어선다는 계획이 서자 목회지를 다시 찾아나서야 했"던 정명기가 부평으로 가서 노동자를 위한 광야교회를 세우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80년 서울의 봄'과 중앙대생들의 사당동 시위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