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관 신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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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는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규식도 그랬다. 그가 추구하는 혁명의 최종 목표인 조국해방이라는 과제는 죽을 때까지, 죽은 뒤 혼령이라도 추구하고 수행해야 할 사명이고 소명이었기 때문이다. 국제정세는 불리하게 진행되고 중국의 정정은 한 치 앞을 예측키 어려운 반동기로 치닫았다.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독일군을 공격했다. 독일이 중국에서 가지고 있는 이권을 차지하겠다는 야심이었다. 독일군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을 장악한 일제는 중국정부에 굴욕적인 '21개 조항'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독일이 갖고 있는 여순ㆍ대련의 조차권, 남만주 일대의 철도부설권 등이 포함되었다.
원세개 정부는 별다른 저항없이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다. 일본이 원세개의 개인적인 야심을 만족시키는 반대급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21개조 요구 협상을 벌이면서 원세개에게 "만일 성의를 가지고 교섭에 응한다면 일본정부는 대총통(원세개)이 다시 더 높은 단계에 오르는 것을 기대한다"라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자기가 황제가 되는 것을 일본에게 양해받는 교환조건이었다. (주석 1)
원세개는 1915년 10월 '국민대표대회조직법'을 공포하는 등 황제 등극을 위해 적극나섰다. 하지만 인민들은 대부분 이를 반기지 않았으며 국제사회도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로 인해 중국의 정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신규식은 정치적 반동기에 곤경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망명할 때 가지고 왔던 자금 중 적지않은 돈을 중국혁명 동지와 경영이 어려운 『민립보』에 기부한 것이 원세개 세력에 발각되면서 체포령이 내리고, 몇 차례 테러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또 일본총리대신 가쯔라(桂太郞)의 만주방문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암살하려한 사건의 혐의를 받아 외지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이런 정황에서도 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원세개 정부의 탄압으로 유명무실해진 동제사를 다시 복구하는 한편 박은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団)을 새로 조직하였다. 박은식을 단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운영의 책임을 맡았다. 평양의 한진교, 정주의 선우혁, 만주에 있던 조성환ㆍ박찬익의 협조를 통해 노령에까지 조직을 확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