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의 모형도이 한번 싸움에 이순신 장군이 공들여 키운 조선 수군이 궤멸되었다.
김희태
여기에 원균은 "이순신이 머뭇거리고 있다"거나 "순신이 명령을 받고도 출병하지 않는다"라고 상소를 올렸고, 그 결과 이순신 장군의 파직에 간접 영향을 미쳤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파직한 뒤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런데 웃긴 건 정작 원균 자신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뒤 부산포로의 출전을 미뤘다는 점이다.
이때 원균은 수군 단독이 아닌 육군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며 수륙병진을 주장했고, 출전을 미루다가 도원수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원균은 부산포로 출전했다가 결국 칠천량 해전이라는 비극적인 참패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칠천량 해전의 현장에는 현재 칠천량 해전공원과 전시관이 들어서 있는데,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418-2번지다. 이곳에는 전시관과 함께 칠천량 해전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우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분명 기억하기 싫고, 마주하기 싫은 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칠천량 해전의 원인과 경과, 결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역사의 교훈으로 되새겨야 할 장소로 주목해야 한다.
원균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엉규이 무덤이 통영에 있는 이유
칠천량 해전지와 함께 주목해야 할 장소 중 통영에 있는 원균의 무덤으로 전하는 엉규이 무덤이 있다. 해당 무덤은 칠천량 해전의 패전 이후 상황과 관련이 있는데, 당시 선전관인 김식(金軾)이 올린 장계를 보면 칠천량 해전 이후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 혹은 춘원포)로 후퇴했음을 알 수 있다.
추원포는 지금의 통영시 광도면 황리와 안정리 일대로 추정되는데, 지형을 보면 철저하게 고립된 곳이다. 이런 곳으로 후퇴했으니, 왜군이 본격적으로 봉쇄하게 되면 빠져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 이후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을 쳤는데, 이 과정에서 원균의 생사조차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당시 김식이 올린 장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 <선조실록> 권90, 1597년(선조 30) 7월 22일 중
때문에 <선조실록>에 기록된 원균의 최후 모습과 엉규이 무덤의 위치를 고려할 때 해당 무덤이 원균의 묘로 비정되는 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지역에서는 '엉규이=원균'의 지역 발음으로 보기도 하며, 이를 보여주듯 평택에 있는 원균 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제57호)는 시신이 없는 가묘다. 하지만 원균의 실제 무덤일 수도 있는 엉규이 무덤은 외면 속에 방치된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