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손으로 모내기 하는 모습. 이젠 시골에서 누구도 손으로 모내기를 하지 않는다.
노일영
그날따라 고구마는 자석처럼 호미를 끌어당겼다. 캐어 놓은 고구마들은 모두 호미에 찍혀서 상처투성이였다. 상품으로 팔 것이 거의 없었다. 계속 이런 상태가 유지된다면, 죽도 싫고 밥도 싫으니, 겨우내 고구마만 먹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계속해서 고구마를 캤다. 흙을 박차고 나온 고구마들은 호미에 찍혀 거의 다 허연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갇힌 방에 걸려 있던 그림 속의 두 문장,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그렇다, 고구마들은 매몰된 탄광에서 구조된 광부들처럼 함께 웃고 있었으나, 밭에서 나는 혼자 울고 있었다.
점심이나 새참을 들고 올 거라 기대했건만, 사방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남편은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강호의 도리를 안다면, 최소한 군만두 정도는 배달해 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남편은 제 코가 석 자인 듯했고, 강호의 도리는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남편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 33.33%의 좋은 놈·나쁜 놈·이상한 놈 중에서, 그날의 남편은 나쁜 놈이 99%를 차지하고, 이상한 놈이 0.9%, 좋은 놈이 0.1%였다.
맙소사. 남편은 다락방에서 술에 쩔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꼬리를 사타구니에 말아 넣고 주둥아리에선 침까지 흘렀다. 측은하지만 냉정해야 한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휘둘려선 안 된다, 제 점수는요, 10점 만점에 1점을 주기도 아깝습니다. 이놈은 내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니다.
그 남자는 댄디했고, 지적이었고, 유머가 있었으며, 다정다감했고, 항상 멋있었다. 아내가 하루 종일 고구마를 캐는 동안, 낮술에 취해 다락방에서 침이나 질질 흘리며 처자빠져 자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남편의 컴퓨터 모니터에는 '3-1. 예비 마을기업 사업계획서 개요'가 그래도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자, 잠깐, 잠깐만요, 심사위원의 권한으로 '슈퍼패스 카드'를 쓰겠습니다, 그냥 탈락시키기엔 그래도 좀 아까운 구석이 있는 남자로 판단됩니다. 다음 라운드에서 한 번 더 지켜보는 걸로···.
갑자기 떠오른 기발한 아이디어
사업이라고 해봤자, 고등학교 때 '일일 찻집'을 한 번 해 본 경험밖에 없는 남편이 만든 사업계획서 개요를 보자. 참고로, 그 '일일 찻집'은 바글바글 인파로 북적였지만, 적자였고 끝내 파산의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배경을 알게 되면, 남편이 작성한 개요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게 정상인의 사고 패턴이지만, 정성이 갸륵해서 '슈퍼패스 카드'를 사용해버리고 말았다.
3-1. 예비 마을기업 사업계획서 개요
1. 사업명 : 밤·산수유 등 농·임산물을 이용한 마을 자립 사업
2. 사업 목적 :
➀ 알밤을 수매업체에 출하하지 않고 직접 판매
➁ 밤 가공식품 개발
➂ 산수유 공동 관리·생산·판매
3. 사업 내용 :
➀ 알밤 직접 판매를 위한 모델 개발 사업
➁ 밤 가공식품 개발을 위한 사업
➂ 산수유 상품화 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