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이은 1987의 정신, 박종철을 추모하다

이산하 시인, 모교 방문 박종철 열사 추모 행사 가져

등록 2021.05.26 11:32수정 2021.05.2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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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철 사망 당시 서울대 추모제 행렬(전승일作)
박종철 사망 당시 서울대 추모제 행렬(전승일作)박종철 기념사업회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1987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 단신 기사 제목이다. 학생 운동 도중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잔혹한 물고문을 받던 혜광고 출신 서울대 언어학과 3학학년생 박종철의 죽음은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사건 은폐 기자회견과 더불어 전국민에게 진실과 정의에 대한 갈망을 촉발시켰다.

그로부터 두 달 뒤 박종철의 고등학교 4년 선배인 이산하 시인은 '목숨을 걸고 만든 폭탄'이라는 말과 함께 제주 4·3사건을 다룬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녹두 서평> 창간호에 발표하며 사십여 년간 금기시돼 온 국가 주도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전국에 폭로하여 민주항쟁의 기폭제를 마련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2017년, 민주주의 회복을 갈망하는 시민들의 염원이 다시 모여 전세계에 유례없는 평화 집회를 통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그해 연말 개봉되었다.

영화 제작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 속에서도 박종철 열사의 고교 후배인 김윤석과 오달수는 대공수사처장과 일간지 사회부장역을 자처해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선배가 남긴 민주주의의 발자취와 숭고한 정신을 지켜나가고자 했다.

선후배가 함께 추모하는 '박종철'
 
 박종철 열사 추모비 앞에서 생각에 잠긴 이산하 시인
박종철 열사 추모비 앞에서 생각에 잠긴 이산하 시인김성일


지난 25일, 이산하 시인은 졸업생 초청 특강 연사 자격으로 모교인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찾았다. 이 시인은 "추모란 역사적 진실을 확인하고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예정된 행사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교정에 도착해 박종철 열사 추모비를 찾았다. 시인은 그것을 '예의'라고 표현했다.


이 교정에서
함께 미래를 꿈꾸었던 벗들.
또 우리의 뒤를 이어 오는 후배들.
당신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나는 아직도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 박종철 열사 추모비, 이산하 작

  
 혜광고 졸업생 초청 특강 모습
혜광고 졸업생 초청 특강 모습김성일
 
강연에서 이 시인은 22년만에 낸 신간 시집 <악의 평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장편시 '한라산'이 눈에 보이는 거대한 '악'이었다면 현대사회의 '악'은 눈으로 보기 힘든 자욱한 안개와 같습니다. 인간은 한계 상황에 다다르면 누구나 내면에서 흉기를 꺼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나'가 여러분의 적일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이 시인에게 제주 4·3사건과 민주항쟁 속 필화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우리 역사의 상처였다.
   
 추도사를 읽는 혜광고 총학생회
추도사를 읽는 혜광고 총학생회김성일
 
"혜광고등학교 재학생 일동은 박종철 열사의 추모를 위해 이곳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저희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아직도 눈을 감지 않고 계실 당신은 참으로 많은 것을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당신의 깊은 의지와 신념이 민주주의를 노래하게 하고 민주화의 길을 걷게 했습니다. 당신의 희생과 열정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우리 모두는 기억할 것입니다.

저희는 당신의 희생과 열정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기억하며 다음과 같이 '선서'합니다.
하나. 만인을 위한 꿈을 이루고자 한 청춘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둘. 박종철 열사님의 의지를 따라 진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셋. 당신의 뒤를 이어가는 훌륭한 혜광인이 되겠습니다." - 총학생회장 조우진


강연이 끝나고 재학생들이 마련한 박종철 열사 추도식에 참석한 이 시인은 행사 내내 생각에 잠겨 본인이 직접 시를 쓴 추모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추모비 건립 이후 처음으로 모교를 방문한 이 시인은 혜광고 총학생회의 추도사가 끝난 후에야 생각이 조금은 정리된 듯 짧은 말 한마디를 건넸다.

"말을 아끼고 싶습니다."
 
 박종철 열사 추도식에서 묵념 중인 이산하 시인과 고 박종철 동기 임태영씨
박종철 열사 추도식에서 묵념 중인 이산하 시인과 고 박종철 동기 임태영씨김성일
  
이산하 시인에게 2021년은 어떤 해일까? 문단에 복귀한 작가로서의 심정을 물었다.

"박종철 열사 추모비가 교내에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직접 보는 것이 무척 뜻깊습니다. 더군다나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내 시를 읽고 직접 편지를 써서 초대해주고 후배들이 마련한 추도식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가슴이 조금 벅찹니다."

이제야 옅은 미소를 보이는 이 시인의 표정에서 그토록 자유와 정의를 갈망했던 1987년의 외침이 이제는 교정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박종철 열사 추도식에 참석한 혜광고 총학생회와 이산하 시인
박종철 열사 추도식에 참석한 혜광고 총학생회와 이산하 시인김성일
#이산하 시인 #박종철 추모비 #혜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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