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경과 양기탁 유동열 등의 합작 소식을 전하고 있는 동아일보<동아일보>는 1935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현정경이 남경에서 활동하고 있는 양기탁, 유동열 등과 연락을 취해 합작한다는 정보에 기초하여 기사를 썼다. 현정경이 당시 독립운동상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상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사다.
동아일보
독립운동가 현정경(1881~1941)이 1992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을 당시 현정경의 아들 현태균(당시 78세)는 사당1동에 살고 있었다. 태균에게 아버지 현정경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은 남다른 감회로 다가왔다. 아버지 현정경이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음에도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1992년 8.15 광복절을 앞두고 마침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에는 "좌익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던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음으로써 반쪽 역사가 온전히 회복돼 가는 것 같아 기쁠 따름"이라는 손자 종오(당시 36세)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평북 박천 출신의 현정경은 1912년 만주로 망명해 항일단체인 한족회에 가입하고 서로군정서에서 조선독립단원이 돼 민족독립사상 고취와 무장투쟁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까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이끈 인물이다.
그는 1922년에 만주 독립운동의 통합 단체인 통의부(중앙집행위원장 김동삼)에서 법무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정의부가 창립됐을 때는 중앙집행위원 겸 민사위원장으로, 양기탁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려혁명당을 결성할 당시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는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된 조선혁명당의 집행위원장 겸 비서부위원장을 맡아 현익철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이끈 지도자였다.
이후 활동무대를 중국 내륙으로 옮긴 현정경은 1937년 일제의 중국 대륙침략이 시작된 직후 김성숙·박건웅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중경에서 조직해 주석으로 추대됐다. 이 단체는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발전했다.
1940년 지장에서 열린 독립운동단체 연합회의 석상에서 각 단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로 총결집해야 함을 주장하는 등 민족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던 현정경은 1941년 5월 10일 병을 얻어 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한 채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한국광복군의 김용주, 해방 이후 사당동에 살다
한국광복군 출신의 김용주(1912~1985)는 해방 이후 사당1동에 살았던 인물이다.
황해도 신천 출신의 김용주는 1938년 중국으로 망명해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여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한청반을 수료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만들어졌을 때 제2지대 총무조원 겸 공작조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40년 홍아사진관의 사진사로 일하게 되면서 사진사 자격으로 일본군 병사(兵舍)를 출입할 수 있는 문감(출입증)을 발급받아 자유로이 정보를 수집하고 동지를 포섭하는 활동을 과감히 벌였다고 한다.
1942년 3월 대원의 불화로 인한 5지대장 나월환의 암살사건에 연루돼 2년 도형을 받는 등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는데, 사면돼 출옥한 후에는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들어가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한다. 훈련 과정을 마치고 국내 정진군 함경도반 반장에 임명된 김용주는 국내진입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국내진공작전이 성사됐다면 해방 정국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김용주가 1985년 연탄가스 중독으로 별세할 때에는 방배동에 살고 있었다. 사당동에서 어느 시점에 방배동으로 이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당동에서 돌아가신 독립유공자 박팽동과 주흥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