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판결문> 표지.
블랙피쉬
<불량 판결문>(2021)의 저자인 최정규 변호사가 대한민국 법정의 부조리함과 불공정성을 꼬집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사법연수원 1년 차 시절에, 2년 차 연수생이 점심시간도 없이 하루 8시간 판결문을 쓰는 기록형 시험을 마친 뒤에 쓰러져서 세상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이후 간담회가 개최되었지만, 교수들은 '사법연수생은 국민에 봉사하는 법원 공무원이므로 8시간 기록형 시험을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점심시간도 보장해주지 않는 사법연수원의 8시간짜리 시험에 대한 교수들의 완강한 입장처럼 우리 사회는 상식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법을 뜯어고쳐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여전히 강하다. 법이 만들어진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가치를 '법적 안정성'이라고 하는데, 법의 불합리함을 비판하는 것이 법적 안정성을 해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답했다.
"법적 안정성은 일개 변호사나 활동가가 고려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법적 안정성을 걱정할 만큼 이주 노동자나 장애인의 상황이 느긋하지 않다. 사실 굉장히 다급하다. 당장 오늘도 하루에 10시간 일하고 있는데, 정당한 임금이나 숙소조차 제공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분들의 피해를 묵인하는 제도와 관행, '지금까지 제도를 안정적으로 운영해왔으니 앞으로도 동일하게 유지해나가자'라는 식의 논리는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랑은 조금 결을 달리하는 것 같다. 법적 안정성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분들의 피해를 빨리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합리한 법이 문제니까 국회를 압박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국회에서 법이 만들어지고 나면, 이후에 법원에서 법이 '해석'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판사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치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하기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판례'는 이후의 판결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저자는 어떤 사건을 접할 때마다 판례를 찾아보는 자신의 행위를 "나쁜 습관"이라고 설명한다. 판례가 힘 있는 자들의 논리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큼에도, 판례를 확인하는 것 외에 생각을 멈추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힘 있는 자들의 논리로 가득 찬 공간인 법원은 심지어 게으르기까지 하다. 재판 시간을 어기거나 일방적으로 미루는 판사, 생략되고 왜곡되기 일쑤인 변론조서, 정확히 언제 열릴지 알 수 없는 변론 기일, 불친절한 법률 서비스 등등... 이런 것들이 모여 불량한 법원과 불량한 판결이 생겨나는 것이다. 법원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누구나 법원이 이렇게나 게으르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다.
법원에 대한 비판은 자칫 사법부의 독립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사법부의 독립권은 국민을 위한 것이지 법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 또 우리가 존중해야 할 건 사법부가 선고하는 판결이지 불편부당한 서비스가 아닐 것이다. 법원에서 선고하는 판결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민들을 향한 법원의 불편부당한 서비스는 비난받아야 한다. 높디높은 법원 문턱이 다 사라져 국민들이 지금보다 더 쉽고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희망해본다.
고민하는 법원으로 거듭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