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의 도장현존하는 박재혁 의사의 유일한 유품인 도장이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견되었다. - 사진 제공 이손녀 김경은
김경은
대구 형무소 창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별이 반짝이는 밤이었다. 박재혁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죽음을 결심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한다. 27년의 세월이 한순간임을 깨달았다. 박재혁의 삶에 가장 빛나는 날은 부산경찰서 투탄의 시간이었다. 별이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기로 했다. 보낼 수도 없는 독백의 편지였다.
어머니!
제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어머님이 끓여주신 미역국 먹던 날이 생각납니다.
이제 저는 어머님 곁을 떠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갑니다.
제가 떠난 뒤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슬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울지 마십시오.
어머니!
대한의 아들로 태어나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당당하게 죽으렵니다.
저 간악한 강도 같은 왜놈들이 이 땅에서 집어삼킨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어린 날에 일본이 부러웠습니다.
그들의 문명이 행여 우리의 문명이 되리라 기대했습니다.
나라의 위부터 아래까지 부패하여 희망이 없는 대한제국이었습니다.
전통과 개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문명은 와해하였습니다.
민족은 쇠약하여 애국심도 고갈되기 직전이요, 관료는 부패가 극에 달하였지요.
희망을 아무리 짜고 짜도 나올 듯하지 않은 혼돈의 시절이었지요.
외국의 간섭이 유일한 희망인 듯 보였습니다.
힘없는 나라를 힘 있는 나라가 개화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일본의 놀랠만한 진보 발전은 커다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은근 일본이 통치해주기를 바라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친일 매국노는 합방이 당연하다고 박수하였습니다.
박수는 아닐지라도 욕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
하지만 10년 세월이 지나자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오해 망상을 참회하고 땅을 치고 통곡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칼 찬 교사 일본어로 수업하고 일본어로 교과서를 만들고 일본어 과목을 배웁니다.
우리말 우리글 우리 역사는 있지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한국의 정신 우리의 혼이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우리 땅의 쌀은 저들의 쌀이 되었습니다.
동양척식회사가 잠입하는 곳에는 반드시 한국인은 축출을 당하였습니다.
조선 놈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면 태형(笞刑)으로 살상의 통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면서 검열은 한 자 한 구절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경축일만 되면 길거리 상점마다 강제로 일본 국기를 게양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은행에서 돈을 찾아도 내 돈인데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정치의 자유, 교육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도 없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한국의 공기조차 맘대로 쉴 자유가 없습니다.
저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한 일이란 우리의 고혈(膏血)을 짜서 일본으로 가져간 일뿐이었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동화(同化)하기를 원하지 않아요!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고 싶어요!
우리의 언어, 풍속, 습관, 종교, 우리 고유의 문화를 따르며 살고 싶어요!
저들 제국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
삼천리강산 이천만 동포들이 노예 아닌 노예가 되었습니다.
왜놈이 지배한 이래로 우리의 삶은 비극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기미년 만세 소리가 삼천리강산 곳곳마다 청천벽력같이 울렸지요.
합병 이후 무기란 무기는 모두 빼앗겼지요.
하지만 한국인은 열 배 천배 이상의 용기를 가지고 외쳤지요.
모두가 맨주먹 전사(戰士)가 되어 두 팔 자유롭게 펼치며 마을마다 골목마다 다녔지요.
양반도, 상민도, 남녀노소, 학생도, 종교인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외쳤지요.
친일 모리배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쳤지요.
산을 넘고 강을 넘어 바다 건너 만세 소리가 울렸지요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가 어디 우리 땅에서만 울렸나요,
바다를 건너 일본에도 구라파에도 미주에도 울렸답니다.
한국인의 자유를 향한 절규는 세계 곳곳에 약소국 식민지 백성들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요.
10년 동안 유린당하였던 자유와 정의를 외쳤지요.
오랫동안 참고 견디어온 분노를, 원한을 마음껏 드러내었지요.
어머니,
대한 독립 만세!
그 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이 역사적 순간을 저는 내 나라 땅에서 하지 못하였습니다.
원통합니다.
어머니!
우리 땅은 우리 스스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주야로 소원하는 바는 바로 '독립'입니다.
한국인에게 독립은 이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우리의 멱살을 잡고 놓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왜놈들이 우리에게 공헌한 점은 딱 하나가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독립의 꿈을 주었고 투쟁적 정신을 주었고 대동단결을 하게 하였습니다.
어머니!
독립운동의 전선에 물러서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독립을 얻기 전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 결코 투쟁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불의무도(不義無道)한 저 강도 왜놈들을 그대로 참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상해에서 기미년 만세운동으로 독립이 되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파리강화회의에 갔던 김인태가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지만, 강대국은 외면했습니다.
세계 문명국들도 저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강도 일본과 한패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 함께 손잡고 세계 평화와 약소국의 해방을 위해 발맞추어 나가야 하지만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우리의 독립은 우리의 손으로 이루는 것이지 남의 손을 빌려 이룰 수는 없습니다.
강도 일본과 총칼로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군대가 없다면 단신으로 의열의 정신으로 온몸이 폭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렬하게 저들의 심장부에 제 한 몸 불사르리라 다짐하고 다짐하였습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늘 저를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어머니, 더 많은 누이동생의 눈물을 조금이라도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부산경찰서에 투탄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었지만 끝내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이 약해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잔혹한 왜놈에 애국심도 고갈될 수 있습니다.
저는 등잔불에 붓는 기름이 되렵니다.
그리하여 독립의 불길이 해방되는 그 날까지 꺼지지 않는 마중 기름이 되렵니다.
어머니!
꿋꿋하게 견디세요.
저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저들의 잔악함에 분노하십시오.
저는 민족해방의 제단에 감히 저를 바치기로 했습니다.
생명이 사라진다는 것, 죽어 사라짐은 분명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 왜놈들에게 내 목숨을 맡기는 것은 더 치욕입니다.
저들에 사형당하느니 차라리 제 손으로 제 목숨을 끊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살하여 저를 지옥에 보낸다고 하여도 절대 왜놈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렵니다.
어머니!
그러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백 년을 살기보다 단 하루라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내 이름 석 자에 오욕을 남기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민족해방의 그 날이 나로 인해 하루라도 당겨진다면 더덩실 춤을 추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신라 황창랑(黃滄浪)처럼 나의 죽음 뒤로 수많은 황창랑이 생길 겁니다.
어머니!
절대로 절대로 민족해방이 되기 전에는 죽지 마세요.
나는 비록 짧은 생애이지만 어머니 생애는 고래 심줄 같아야 합니다.
두 눈 부릅뜨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기다려주세요.
나의 죽음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지켜봐 주세요.
저는 죽어서도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켜보겠습니다.
어머니!
정공단 친구들에게는 절대로 죽지 말라고 해주세요.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끝까지 살아서 해방의 그 날을 맞이하라고 하세요.
한 번의 독립운동으로 독립, 해방은 날은 오지 않으니 끊임없이 투쟁하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친구들에게 정공단의 정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만수무강하세요.
사랑하는 어머니.
박재혁, 1921년 5월 11일 순국하시다
1921년 5월 11일. 박재혁은 최천택이 면회를 하고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순국하였다. 대구 감옥에서 시체를 가져가라는 전보를 받았다. 급거(急遽) 대구에 가보니 박 의사는 자진(自盡) 절명(絶命)한 뒤였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다.
박재혁의 제적부에 따르면, 박재혁은 대정10년(1921)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대구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5월 11일이 사망일로 나왔다. 다른 신문에는 5월 13일 또는 14일을 순국일로 기록하였다.
<한민족독립운동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사>는 박태원의 기록에 따라 투탄 9일 후인 9월 22일 단식 순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충원 비석에는 4월 23일로 새겨져 있었다. 5월 12일 사망 보도는 해방 후 1946년 3월 1일 박재혁의 추모제를 보도한 <민주중보>였다. 아마 기록 대부분은 이 신문 보도를 사실로 받아들인 듯하다. 당시 신문 보도는 최천택의 증언에 따른 것이었다. 부산어린이대공원 박재혁 동상, 부산진초 비석에도 순국일을 5월 12일로 기록되어 있다.
순국일을 4월 23일로 기록한 현충일은 2020년 투탄 100주년을 맞이하여 5월 11일로 수정하였다. 이런 오류는 당시 신문이나 박재혁의 제적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이다. 순국 100주년이 되는 현재도 박재혁의 기록은 오류가 몇 가지 있다. 뻔한 오류를 수정하지 않은 것은 고인에 대한 모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