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진위대 시절 이동휘 한성무관학교를 졸업한 이동휘는 궁전진위대장에 임명되었다. 타고난 무인이었던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1903년 5월부터 1905년 3월까지 성재는 진위대장으로 대한제국의 요충지인 강화도 방위를 책임졌다. 사진 앞줄 중앙이 이동휘다. 조상석, 홍우섭, 박제언, 유홍준, 최영순, 김정배가 함께 있다.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하사와 병졸들을 해산시키는 훈련원 연병장에는 일본군이 착검을 하고 삼엄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예정된 시각 10시가 임박하여 각 부대가 도착하였다. 그러나 12시가 지나도 연병장에 집결한 군인은 1000명도 되지 않았다. 제1차 해산 대상 군인 3441명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 수준으로, 해산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규식은 국가의 마지막 보루인 군대가 해산되는 꼴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해산식이 거행되는 훈련원으로 나갔다. 제1연대 제1대대 박성환 참령(소령)이 군대해산을 거부하며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지척에서 이를 알게 된 신규식은 부하들과 함께 무기고를 부수고 탄약과 총으로 무장, 대한문 앞까지 진출했다.
즉각 출동한 일본군은 월등한 무기와 병력으로 육박해 왔다.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일본군은 기관총을 난사해댔다. 선두에 섰던 예관은 이에 펄펄 달아오른 불덩어리였다.
"한 사람도 후퇴하지 마라!"
그러나 수 십번이고 외쳐 보았자 병사들은 밀리기 시작했고, 그가 다시 막사로 돌아왔을 땐 부하들의 얼굴 태반이 보이지 않았다.
"헛된 순국이었구나"
예관은 격앙된 감정을 누르고 하나뿐인 눈을 지긋이 감았다.
"내 존경하는 박 참령이 갔다. 내 사랑하는 부하들도 갔다. 아 나라는 엎어진 배, 내 목숨은 옛날에 없어진거나 다름없는 것, 참 구차스럽구나."
애꾸눈을 번쩍 뜬 예관은 칼을 쑥 뽑아 들었다. 옆에 섰던 부하 하나가 재빨리 칼을 빼앗았다. 예관은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졸도한 것이다. (주석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