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예관 신규식 선생
독립기념관
합리적 추측이 가능하다면, 신규식의 아버지가 고향 이름의 명칭을 따서 문동학원을 세우고, 가까운 일가의 개화 청년 신채호와 신백우를 불러 강사로 삼았다. 신규식은 그때 무관학교 재학 중이어서 전임 강사를 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관학교를 졸업한 신규식은 곧장 향리에 덕남사숙(德南私塾)을 설립하였다. 외세침탈이 극심해지면서 국민이 배워야 한다는 사명감에서이다. 그는 전통적인 학문이 아닌 실업과목을 중점으로 가르쳤다. 이 대목에서도 그의 파격의 행적이 드러난다.
1903년에는 신규식이 향리에 덕남사숙을 설립하게 된다. 이 학교에서는 산술ㆍ측량 등의 10여 과목을 가르쳤으며, 청주에서 교사를 초빙하고 근대식 학교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 학교에서 주로 실업과목을 교육하였던 것은 근대문물의 교육을 통한 자강ㆍ자주의식의 고취가 교육목적이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문관을 선호했던 이 산동문중에서 실업을 위주로 한 교육이 실시될 수 있었음이 주목된다. 이것은 개화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문중내에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주석 6)
그는 이 학교에 열정을 바쳤다. 아버지와 개화된 문중 어른들의 지원으로 10여칸의 교실이 마련되었다.
눈이 하얗게 덮인 겨울 어느날, 10여칸의 아담한 교사 앞에서 주민 백여명과 학동 80여 명이 모인 덕담사숙의 개교식에서 신규식은 이 사숙을 세운 뜻을 밝히며 입을 열었다.
"어린이는 나라의 기둥입니다. 또한 보배입니다… 우리가 망하게 된 이유는 무(武)를 업신여긴 것과 또한 교육을 등한히 탓입니다… 이순신의 철답 거북선을 한 낱 녹슨 쇠붙이로 만든 후손이 나라 망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요 또 이 원인은 교육이 철저치 못한 탓입니다…이 나라 먼 장래를 내다 볼 때 어린이 교육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주석 7)
주석
5> 임춘수, 앞의 책, 480쪽.
6> 앞의 책, 489쪽.
7> 강영심, 앞의 책, 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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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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