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2월 28일 부산지역 노동조합 연합 송년회에서 공연 중인 햇새벽 풍물패(맨앞이 박창수 열사).
한진중공업 열사정신계승사업회
창수는 부산 문현동 산동네 슬레이트집 단칸방에서 부인, 아들, 딸 네 식구가 살았다. 어려운 삶에도 함께했던 동료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했고, 노동자들의 진정한 일터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현장 내 풍물패 '햇새벽'의 회원이 되었다.
한진중공업 햇새벽 풍물패는 1989년 최초로 민주노조가 세워지면서 만들어졌다. 발족 당시 풍물패원은 50여 명이었다. 동아대학교 벙커에서 학생들의 지도를 받으며 풍물 가락을 익혔다. 풍물을 친 지 일주일만에 조선소 내 지신밟기를 했다. 영도조선소 8만 평과 다대포 공장 6만 평을 돌면서 지신을 밟았다.
배운 지 겨우 일주일이었지만 선생이 치는 대로 따라 치고 선생이 내는 소리를 따라 했다. 7시간 동안 북, 장구를 메고 풍물 울림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단원들은 초주검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호응은 대단했다. 지신밟기 수입도 좋아서 덕분에 북과 장구를 구입하고 선생님 보너스까지 줄 수 있었다.
한번은 동지들과 함께 남천병원 간호사들의 파업 현장에 문화공연을 나간 적이 있었다. 햇새벽 패원들은 퇴근하면 연습실에 모여 노래와 풍물로 혼합된 단막극을 준비했다. 용접쟁이, 기름쟁이들로 구성돼 유연성이라고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열정 하나는 대단했다.
드디어 파업 중인 간호사들 앞에서 선을 보이는 날이 왔다. 당시 풍물패 단원들 나이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이었다. 20대 초반의 간호사들 앞이라 다들 긴장을 했던 모양이다. 북채를 놓치는 일이 허다했고, 대사를 까먹는 해프닝도 속출했다. 하지만 오히려 박수는 더 많이 받았다. 창수는 북도 치고 기타도 치며 파업현장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창수는 노동조합 활동에서도 모범적이었다. 위원장으로 출마하기 전까지 현장 활동가의 역할을 충실히 실천했고 노동자다운 삶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노동조합 감사 자리는 그러한 철학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동지가 바로 창수였다.
조합비 사용에 대한 원칙도 명확했다. 조합비는 개인이 소득을 올리는 밑천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는 것과 조합원들과 함께하는 운동을 강조하며 그에 알맞은 사업배치를 요구하도록 주문했다. 또 사업배치에 따른 사업비는 아낌없이 지출해야 한다는 회계의 원칙을 요구했다.
94% 압도적 지지로 위원장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