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 14조 서고문갑오개혁 때 관보에 실린 국한문혼용체 서고문
소와당
소년 신규식의 생애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은 1894년부터 시작된 갑오개혁(갑오경장)이다. 일본군은 동학농민혁명 진압을 명분으로 들어왔다가 전주화약 후 주둔할 구실이 없어지자 조선 정부에 내정개혁을 압박했다. 이에 정부는 자체적인 개혁에 나선 것이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은, 관제를 개혁하여 왕실과 국정을 분리하고 국왕의 인사ㆍ재정ㆍ군사권을 축소했다. 또 과거폐지, 신분을 가리지 않는 인재등용, 사법권의 독립, 연좌제 폐지, 은본위제로 화폐제도 정비, 도량형 통일, 조세의 금납화, 노비제도의 폐지와 인신 매매 금지, 과부의 재혼 자유, 남녀 조혼 금지, 중앙 정부 기구와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유교 본위의 교육을 대신할 근대적 학교 제도의 실시 등이 이루어졌다.
갑오개혁의 내용 중에는 신분 타파와 과부의 재혼처럼 동학군의 요구 사항과 일치하고 있는 부분도 있으나, 동학군의 요구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던 토지의 분배는 전혀 논의되지 않는 등 봉건 지주를 비롯한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개혁의 한계를 드러냈다.
당시 조선 양반가 자제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과거제가 폐지되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신규식도 다르지 않았다.
17세가 된 1896년 봄 향리에서 경기도 명문가인 한양조씨 규수 조정완(趙貞完)과 혼인하였다. 장인은 군수를 지낸 조종만(趙鍾萬)이었다. 신부는 남편이 혼인한 후 3개월 만에 신학문을 공부하고자 서울로 떠나고, 얼마 뒤 중국으로 망명함으로써 길고 긴 별거의 세월을 홀로 살아야 했다.
당시 선비들은 아내에 관해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를 미덕처럼 여기는 풍조였다. 그래서였을까, 신규식의 부인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나마 민석린이 지은 책에 「신공(申公) 부인 조정완 여사 유상(遺像)」이란 글과 사진이 남아 있다. 글의 앞 부문이다.
부인 조씨는 경기(京畿)의 명문가 규수이다. 시운이 좋지 않은 때에 태어났으니 바로 나라가 다난했던 가을이었다. 결혼 후 겨우 삼 개월 만에 부군은 집을 떠나 서울로 가서 국사(國事)로 분주했다. 오래지 않아 일본인에 의해 한국 군대가 해산되자, 부군은 의분이 차올라 의병을 조직하여 수개월 동안 생사를 넘나들고 위험을 무릅쓰며 분투하였고, 불행히도 의병 일이 실패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부인은 고향에서 고생을 참고 견디며 십 수 년 동안 외롭고 가난한 생활을 보내다가, 서기 1919년 장녀가 출가한다는 명목을 빌려 비밀리에 상해로 건너가서 비로소 부군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연이어 삼 년 동안 경제적인 곤란으로 온갖 고통을 겪었지만, 결코 원망의 말이 없이 오히려 평상시처럼 태연자약하게 처신하였다. 평상시의 부인을 종합하여 보자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온화하고 친절하여 신공(申公)의 혁명사업에 도움이 적지 않았으니, 진실로 혁명가의 현처(賢妻)로서 손색이 없었다. (주석 4)
주석
1> 신승하, 「예관 신규식」, 『독립운동가 열전(4)』, 53쪽, 한국일보사, 1989.
2> 김삼웅, 『개남, 새 세상을 열다』, 276~277쪽, 모시는 사람들, 2020.
3> 민필호, 『예관 신규식 선생 전기』, 『전집(1)』, 302쪽.
4> 앞의 책, 40~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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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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