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의거 호외부산경찰서 투탄에 대해 신속하게 당시 부산일보는 호외를 뿌렸다. 오택(오재영)은 이 호외를 해방 후까지 경찰의 압수수색에도 걸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
정공단 동지들 검거되다
사건이 터진 그 날 부산일보에서는 신속히 호외를 발행하였다. 부산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부산경찰서 투탄 소식이 알려졌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보도 통제를 일본은 10월 3일, 국내는 10월 4일까지 하였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경무국에 의해 보도 통제가 해제되자 그때부터 신문들은 앞다투어 박재혁의 의거를 보도하였다. 가장 먼저 매일신보가 "부산서에 폭탄 투하- 아주 서투르게 던져서 전진 자도 중상을 했다"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후속 보도가 연일 이어졌다. 정공단 친구들의 검거와 심문 소식도 10월 6일부터 보도되었다. 10월 13일 『상해시보(上海時報)』에도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절혁(樸截赫)으로 거사가 보도되었다.
박재혁과 헤어진 오택은 부산진 교회 토의장에서 부산시내 쪽에서 오포(午砲)와 흡사한 대포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박재혁이 던진 폭탄이라 여겼다. 온몸이 굳어지고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그러나 오택은 한편으로 이상하게도 춤이라도 추고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교회 앞뜰을 배회하던 중 대회는 폐회됐는데 교회 문전에 난데없이 자동차 한 대가 섰다. 부산경찰서 형사 5, 6명이 뛰어들어 오택과 그의 친근자 4, 5명을 포박하였다. 잡혀가는 길에 오택은 집에 들렀다. 이미 집은 가택 수색으로 천장 부엌할 것 없이 전부 파괴되어 있었다. 부모와 처에게 대략 말을 하고 의복도 단단히 갈아입고 "시일은 모르나 무사 귀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마디 남기고 차를 타고 경찰서에 들어갔다. 의거 후 40분 후에 경찰서 인근에 있었던 최천택도 붙잡히었다.
오택이 검거되어 오후 3시경 부산경찰서에 당도하니 폭약 냄새가 넘치고 아래층 사무실은 유리창이 전부 파괴되고 의자는 전복되어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중앙 쪽 서장 의자 판지 위에 선혈(鮮血)이 낭자하여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광경을 보면 오택은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유치장에는 수십 명의 행인이 검거되었다. 상인배로 경찰서 부근 청년 통행자였다. 경찰서 부근을 지나든 행인, 상인 등 젊은이 수십 명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들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부터 통행인 구속자를 일일이 심문 후 전부 석방하고 부산진 5, 6인만 유치장으로 갈라 넣어 두었다. 당시 박재혁 연루자로 체포된 사람은 최천택, 김영주, 오재영, 백용수, 김작치, 강필우 등 6명이었다. 미체포자는 김성일(김원봉), 김병태, 김기득, 박창수 등 4명으로 대부분 중국에 있는 사람이었다. 검거된 연루자의 주소와 직업, 명단은 다음과 같다.
- 부산부 좌천부 469번지 부산 경신상회 점원 하역 최천택(崔天澤, 25세)
- 부산부 좌천현 잡화상인 연루자 김영주(金永柱, 25세)
- 부산 좌천동 29번지 인삼상인 오재영(吳哉泳, 24세)
- 부산 좌천동 215번지 부산주일상회 점원 백용수(白龍水, 24세)
- 부산 좌천동 552번지 김작치(金作致, 24세)
- 경남 울산면 성안동, 당시 부산본정 5정목(丁目) 최태욱(崔泰旭) 방(方) 부산공태상회 점원 강필우(姜弼又, 26세)
체포된 6명 중 강필우를 제외하고 모두 정공단 좌천동 사람들이었다. 이중 부산상업학교 출신은 박재혁, 최천택, 오택, 백용수이었다. 3, 4일지나서 배후 관계와 박재혁과 평소 우의관계 및 금번 공범 혐의가 농후한 오택과 최천택, 김영주 세 사람만 남기고 다른 친구는 모두 풀려났다.
박재혁, 취조를 당하다
판검사 임석회의에 이번 사건은 조일인(朝日人) 차별 없기 위하여 전례 없이 조선인 사법부에 일임되었다. 당시 부산경찰서는 일본인만 책임을 가진 와다( 和田) 사법 주임이 있고, 조선인만 전문 책임을 가진 한석명(韓錫明) 조선인 사법주임이 있고 그 부하에 조선인 부에 취조주임인 유진후(兪鎭厚, 1888~1951)이라는 맹한(猛漢)이 있었다.
한석명(韓錫命, 1890~?)은 관립한성법어학교와 독일협회 중학교를 졸업하여 신학문을 익힌 뒤 대한제국 말기에 내부 소속 통역관으로 임용되었다. 경찰서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한 것을 계기로, 1910년 이후 경상남도 창녕군과 부산부 등지를 거쳐 경남 도경찰의 고등과 형사로 재직했다. 1925년에는 경시로 승진하여 정치범이나 사상범을 다루는 직책인 경상남도 보안과장에 임명되었다. 경찰 근무 당시 다이쇼대례기념장과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8년부터 사천군수, 동래군수, 하동군수를 역임했다. 일제로부터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받고, 종6위 훈6등에 서위(敍位)되었다. 그의 딸로 자매 소설가로 유명한 한무숙과 한말숙이 있다. 한말숙의 절친한 친구가 소설가 박완서(朴婉緖)이고, 남편은 유명한 가야금 연주가 황병기(黃秉冀)이다.
유진후(杞元春盛)는 "경남 일대의 애국지사를 해친 자"로 반민특위에 검거, 수감되었다. 그는 부산경찰서 창설 초기부터 26년간 근무하여 경부(警部)까지 올랐으며 수많은 애국지사를 투옥, 고문하였다. 1920년에는 상해 임정 내무부 서기 정해구(鄭海九) 투옥, 부산경찰서 폭탄 사건의 박재혁 체포 투옥, 동아일보 장덕준(張德俊) 기자를 투옥하였다. 1923년 관동지진으로 민족의식 배일사건으로 최천택・심두섭・전성호 투옥, 1928년 부산진청년회 간부 최천택 외 9명 투옥, 1931년 대구 지역에서 일본의 침략 전쟁 반대 유인물 살포한 조선공산당 부산지부장 이승엽 등 5명 검거 등 그 죄상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1934년 일본 정부로부터 경찰로 훈8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고, 1935년과 39년에는 동래읍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1년 5월에는 경상남도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부산경찰서 투탄 사건은 유진후가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경상남도 부산경찰서 경부보(警部補)였다. 당시 한국인과 자연스럽게 대화할 일본인 경찰이 많지 않았기에 조선인 경찰을 사건 담당으로 배치한 것이다. 박재혁은 어느 정도 치료를 하였지만 무릎 아래의 부상은 심하여 걷지를 못하는 상태였다. 부상으로 제대로 말을 할 형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유진후는 박재혁을 조사했다.
"박재혁, 배후가 누구야?"
"배후! 배후는 조선 총독이고 일본 왕이다. 자주독립을 위한 조선사람이 나의 진정한 배후이다. 왜놈들이 이 땅을 식민지하지 않았다면 결코 독립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너, 이번 밀양폭탄사건 의열단과 관련이 있지?"
"나는 모른다. 하시모토 서장은 어떻게 되었나?"
"서장은 죽지 않았다. 네가 던진 폭탄으로 건물만 파손되었을 뿐 사람은 죽지 않았다. 너는 실패했다."
유진후는 박재혁에게 사실 그대로 알렸다. 어차피 알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이 파괴되고 사람 몇 죽는다고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재혁은 상처로 기력이 없었다. 다만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할 말은 했다.
"비록 내가 사람을 죽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왜놈들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성공한 것이다. 조선사람들이 절대로 왜놈들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의거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나중에 오택이 출옥한 뒤에 각 신문을 보니 국내 신문은 비겁하여 사실 보도도 똑똑지 못하였고 대판매일(大阪每日), 대판조일(大板朝日) 등은 대자특필(大字特筆)하였다.
"선일(鮮日) 양(兩) 민족(民族)의 융화는 근본적으로 실패다. 그 이유는 평양이나 경성에서 폭탄사건이 발생한 것은 괴이(怪異)치 않다. 이는 일본의 위대(偉大)를 모르는 무지한 자의 횡포니 오히려 당연시 하였지만, 이번 부산 사건은 천만의외라 이야말로 동경 한 가운데에 투탄한 것과 동일시할 수밖에 없다. 부산은 300년 동안 일본의 거류지(居留地)이고 현재 일본의 제2 대판(大阪)이고 부산의 조선인은 개화도(開化度)가 일본인과 동일하다. 범인은 부산 태생으로 생후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일본 국력과 일본인을 잘 이해하는 자로서 이러한 배일사상이 내포된 것을 보아서 금후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고 선일융화(鮮日融化)는 단념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것이다."
유진후는 재혁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그치며 취조를 하였다. 박재혁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잡으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절대로 친구들을 사건 공범으로 끌어들이지 않겠다. 둘째로 국내에 없는 사람은 검거 불가능하니 말하겠다. 셋째로 저들이 조사한 것은 마지 못해 고개만 끄덕이겠다. 마지막으로 의열단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박재혁은 이 네 가지를 의식에서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 했다. 의열단의 존재는 밀양폭탄사건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아직 중국과 국내에 남아있는 동지들을 보호해야 했다. 또 친구들은 향후의 독립운동을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주어야 했다. 자기 자신만 희생되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친구와 조직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리에서 전해오는 고통은 상상외로 심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도 정상이지 않은 듯했다. 유진후에게 자기가 이제까지 있었던 삶에 대해서만 간신히 진술했다. 박재혁의 조사 결과는 보도가 해제된 10월 5일 보도되었다.
"원적 부산부 범일동 183번지, 현주소 335번지에 사는 박재혁(朴載赫, 26세)은 본래 부산부 공립상업학교 출신으로 대정 5년(1916) 4월에 잠시 부산와사전기회사의 차장이 되었고, 그 후 다시 경부선 왜관지방에서 무역상에 고용하다가 대정 6년(1917) 6월 중에 그 주인을 달래어 704원이나 되는 돈을 도득(圖得, 꾀하여 얻음)하여 가지고 상해로 건너갔다. 그다음 해(1918) 6월에 고향에 돌아와 두어 달 지나, 두 번째 다시 상해로 건너가 즉시 싱가포르까지 멀리 가서 무역회사에 종사하였다. 금년(1920년) 4월에 상해로 돌아와 7월까지 두류(逗留, 체류)하였다. 그때 상해에서 머물러 있었던 조선사람[김원봉]으로부터 독립운동의 부탁이 있었으나 그의 집안일로 말미암아 그때는 거절하였다. 그달 19일 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지난 8월 초순에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이전부터 간담(懇談), 서로 정답게 이야기함)하든 그 친구[김원봉]를 만나 조국 독립의 최후 성공을 굳게 상약(相約, 서로 약속함)하고 즉시 폭탄 1개와 돈 300원을 얻어 폭탄과 돈 50원을 수건에 싸서 가방에 넣어 가지고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거사하기 전날까지 여러 친구들과 같이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마침내 틈을 타서 이런 위험한 일을 실행하였다. 그 공범한 자도 다수인듯하다."
박재혁은 김원봉의 실명을 밝히지 않고 다만 중국 상해에 있는 '조선사람'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김성일'이라 증언했다. 김원봉을 보호하기 위해 가명으로 조작한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 이름은 실명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공단 친구들은 요시찰대상이었기에 거짓으로 말해도 금방 들통나기 때문이었다. 다만 친구들과 만나서 술 먹고 노는 유흥을 즐겼다고 했다. 거사와 관련한 어떠한 진술도 하지 않았다. 특히 오택에 대한 진술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박재혁은 초인적 인내로 유진후의 취조에 최소한의 정보만 진술했다. 유진후가 다리 상처를 건드리는 고문을 할 때마다 이를 악물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했다.
"육체적 고통은 한순간이지만, 내가 발설하면 친구와 조직은 죽고 붕괴한다. 내가 죽는 것은 잠시이지만 친구와 조직을 배신하는 것은 내 삶의 영원한 치욕이다. 한 번의 배신은 천추만대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는 일이다. 죽음이 가까이 와도 마음은 무쇠와 같이 변하지 않으리라."
정공단 친구들 취조를 받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