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인이 나와 다른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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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이가 학교에 피부색이 어두운 학생이 있다고 한다. 등굣길에 금방 눈에 띄었다고, 그런데 한국말을 곧잘 하는 것 같아 신기했단다. 아마 다문화 가정 아이인가 보라고, 아이들과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라며 모녀간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5년 전 작은 아이 초등 4학년 때 전학 왔던 금발머리 여자 아이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엄마가 러시아인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처음에 호기심 어린 호의를 베풀며 친절히 대했지만, 호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눈에 띄는 외모와 발음이 약간 다르다는 걸 핑계 삼아 몇몇이 아이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 아이는 한 영악한 아이의 주도로 왕따에 내내 시달리다가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한 채 2년여 만에 다른 학교로 다시 전학 가고 말았다. 어두운 얼굴로 늘 혼자 어디론가 바삐 향하던 아이를 우연히 지나칠 때면 마음 한구석에 안쓰러움이 차오르곤 했지만, 내 아이와는 반이 달라 관련 없는 아이라며 외면하곤 했다.
그 아이의 괴로운 심사가 충분히 헤아려졌으면서도 우리 아이에게 잘 대해주라고 선뜻 권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아이도 어렵게 빠져나온 그 영악한 아이의 괴롭힘에 다시 휘말릴까 봐 두려워서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가끔 금발 아이 생각이 나면 적잖이 미안했고 용기 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떠나간 곳에서는 마음씨 좋은 친구도 만나고 잘 자라기만을 뒤늦게 바랄 뿐이었다.
최근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다문화 청소년 2245명과 그들의 부모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국내 다문화 가정 10가구 중 3가구가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또 10가구 중 7가구는 차별에 대해 그냥 참고 넘어갔다고 한다(헤럴드 경제, 2021년 4월 23일 보도 참고).
기사를 보고 궁금해지는 건, 차별받은 일이 있는데 사과를 요구하지도,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그저 참고 넘어간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앞으로 그들이 살아가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생각해 보게 된다.
섬처럼 단절된 사람들
나와 뭔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깎아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출신 대학이 달라서, 세대가 달라서, 직업이, 사는 동네가, 생각이 달라서 등등, 타인이 나와 다른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런 얄팍한 기준들을 들이대며 타인을 나와 위계 지어 갈라놓고는 불손한 우월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변변치 못한 우월감을 무리와 공유하며 약자를 밟고 올라서서 느끼는 폭력의 왜곡된 즐거움을 주변에 전염시킨다. 그러나 이 즐거움은 물 위에 떠있는 작은 불처럼 늘 위태롭다. 나도 언제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든 당한 조롱과 수모는 이해받고 공감받지 못한다면 상처가 되어 삶의 방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다시는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하며 살 수도 있고, 나 하나 지켜내기에도 버거워 타인을 이해할 여력까지는 도저히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설령 누군가 당하는 걸 목격한다 해도 외면할 수 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