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양 유랑> 스틸 사진
피에르 올리비에 프랑수아
아이들에게 북한 말은 낯설지언정 즐거움을 주는 소재다. 영화를 볼 때 자막이 없으면 선뜻 알아듣기 힘들다면서도, 단어를 요모조모 뜯어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식 표현이 거의 없고, 조어의 발상이 기발해 의미를 상상하며 읽게 된다는 거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시절, 학교마다 북한 말을 주제로 계기 수업이 한창이었던 적이 있다. 그래선지 웬만한 북한 말은 배워서 알고 있다. 예컨대 곽밥(도시락)과 가락지빵(도넛),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 닭알(계란), 단물(주스) 등은 뜻을 모르는 아이가 드물 정도다.
난이도가 꽤 되는 단어들도 있긴 하다. 화장실을 '위생실'로, 주차장을 '차마당'이라 부른다는 걸 안다면 중급 수준은 된다. 연인 사이의 데이트를 '산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오징어가 북한에서는 낙지를 가리키고, 북한에서 낙지가 우리의 오징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아이들 사이에서 '탈북민'으로 통하게 된다.
기실 북한 말 퀴즈대회는 학교마다 통일 교육의 단골 소재다. 국어나 사회 교과서에 종종 실리는 데다, 한때 TV의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다뤄지곤 했다. 북한 사람의 말투와 억양을 흉내 내는 것이, 학교 축제 때 선보이는 아이들의 '개인기'였던 때도 있었다.
한 아이는 언젠가 북한 말로 축구 경기를 해설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며, 당시의 느낌을 들려주었다. 그는 낯선 축구 용어와 해설자의 느긋하기 짝이 없는 말투에 연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단다. 정작 축구 경기의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간 방어수가 공격어김을 했습니다. 상대 방어수가 긴 연락을 막아냈습니다. 벌 차기를 얻어냈는데, 11미터 벌 차기 구역까지 거리가 멀어서 단번 차넣기가 어렵습니다. 가운데 몰이꾼에게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친구들에게 퀴즈를 냈다. 북한의 축구 해설의 일부인데, 우리말로 번역해보라는 것이었다. 소수의 '축알못'(축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어렵지 않게 우리말로 옮겨냈다. 번역은 쉬워도, 현장 중계를 이렇게 듣는다면 우스꽝스러울 것 같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와중에 한 아이가 우스갯소리를 건넸다. 북한의 축구 해설이 우리말이고, 그걸 영어로 번역해보라고 해야 올바른 질문 아니냐는 거다. 그의 말마따나, 다른 스포츠 종목도 별반 차이는 없지만, 특히 축구 용어는 토씨를 빼고는 죄다 영어로 되어 있다. 그가 낸 퀴즈를 알아듣게 번역해보면 이쯤 될 것 같다.
"미드필더의 오프사이드입니다. 수비수가 롱패스를 차단했습니다. 프리킥 찬스인데,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거리가 멀어 다이렉트로 슛을 시도하긴 어렵습니다. 센터포워드에게 패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 말은 낯설고 어색하지만, 정겹고 재미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남과 북의 언어가 달라 통일의 장애물이 될 거라고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일축한다. 계기 수업까지도 필요 없고, 북한 관련 영화 한두 편이면 금방 적응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인민과 노동은 어쩌다 '이념의 언어'가 되었나
되레 남과 북 언어생활의 이질성보다, 우리말을 시나브로 잠식해가는 영어식 표현이 백 배는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아이들도 '감각이 있다'보다 '센스가 있다'는 말이, '상세하게'보다 '디테일하게'라는 표현이 훨씬 더 익숙하다고 했다. 한 아이는 북한 말은 영어가 혼재된 우리말에 '백신'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북한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적대감이 크지만, 적어도 북한 말에 대해선 반감이 없다. 영어로 '오염'된 우리글과 말에 대해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호의적이기까지 하다. 남과 북 언어의 이질성을 극복해야 한다면, 기준은 우리보다 북한에 더 가까울 거라는 '종북주의적' 발언까지 나왔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극도의 반감을 드러내는 두 단어, 인민과 노동. 낯설고 어색한 거야 여느 북한 말과 다르지 않지만, 듣는 순간 거부감부터 든다며 손사래를 쳤다. 부러 한자어에 담긴 말뜻을 일일이 풀어 설명해보지만, 아이들의 완고한 편견을 누그러뜨리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 그 두 단어는 '이념의 언어'였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평범한 보통 명사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공산주의에서 비롯된 언어라는 믿음이 확고했다. 인민 대신 국민이나 시민이라고 해야 자연스럽고, 노동 대신 근로라는 말이 상식적인 표현이라고 말했다.
한 아이는 인민공화국은 공산국가이고, 노동당은 공산당과 동의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중국과 북한의 공식 국명과 지배 정당의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여럿 존재하는데도 굳이 '이념의 언어'를 차용할 필요가 있는지 반문하기도 했다.
두 단어만 들어가면, 시대를 초월해 공산주의를 의심했다. 해방 직후 여운형의 주도한 근로인민당도, 지난 2004년 돌풍을 일으킨 민주노동당도 모두 공산주의 이념 정당으로 여긴다. 심지어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조차 공산주의 성향의 단체인가를 묻는 아이가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