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상으로 밤비료 옮기는 모습
노일영
단 한 번으로 충분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미움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단 한 번의 공동 작업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십여 명이 모였지만 서로 간섭하고 다투느라 작업에서 한 사람의 몫도 하질 못했다. 작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구난방에다 이런 오합지졸도 없었다.
작업의 순서부터 작업의 방법 등 모든 문제에서 주민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적으로 간주했다. 그것은 마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 할 만했다. 두레, 향약, 계 등 상호 부조의 집단 무의식은 그저 교과서에만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릴 적 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분명 마을에는 협동이란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안에서 사사건건 격렬하게 대립하는 주민들을 보고 있자니,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마을의 최고 연장자 아저씨에게 물었다. 우리 마을이 원래부터 이랬냐고. 상상을 초월하는 압도적인 자연재해 앞에서는 다들 힘을 모았지만, 늘 갈등은 있었고, 주민들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살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항상 평화롭고 서로를 배려하고 협동하던 우리 마을의 이미지는 내 기억이 왜곡된 결과물이었다.
공동 노동의 파국적 결말은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이 낫 이거 내 꺼 아이가?"
"이 양반이 돌았는 갑네. 도둑놈 눈까리로 보먼 다 도둑질한 거로 뷘다 카디만."
"내 눈이 도둑놈 눈까리라꼬? 이 새끼가요, 니가 저기 중평댁 집에 밤마다 들락거리는 거를 내가 봤다 아이가. 니가 도둑질하러 댕긴 거 아이가?"
"내가 언제 중평댁 집에 들락거맀다 카노. 이게 미친놈 아이가!"
"도둑질이 아이먼, 뭐 딴짓하러 간 기가? 하기사 홀애비가 과부 만나는 게 죄는 아이까네."
70을 넘긴 두 농부가 멱살을 잡고 엉겨붙었고, 마을 주민들은 제각각 제일 미운 상대를 골라 말싸움과 멱살잡이를 시작했다. 그 순간 마을의 공동 작업은 끝장이 났고, 지리산의식주연구회의 활동도 그렇게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는 듯했다.
이해 못할 국가 기관
그놈의 기후 때문이었다. 2020년에도 밤꽃의 개화기 때 비는 줄기차게 쏟아졌고,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댔다. 밤나무에 달린 밤꽃은 보물찾기 놀이를 해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초여름 밤을 농밀하게 뒤덮던 밤꽃 향기는 사라지고 마을에는 한숨 소리만 번지고 있었다.
주민들이 모여서 연구회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서 연구회를 만든 5명의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연구회가 도대체 무슨 수로 이상 기후에 대한 해결 방안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사안은 국가 사회를 구성하는 단체 중에서 함양군이나 농협 같은 기관들이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상 기후가 지역에서 굳어지는 징후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사실 개인이나 연구회 같은 단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 마을에서 밤농사가 시작된 지 50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50년의 세월 동안 농부들은 밤을 산에서 주워 농협이나 중개업자에게 운반하는 수단으로 치부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밤의 출하 가격은 중개업자들이 결정한다. 밤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늘 가격 결정 과정에서 제외되었고, 그 결과 한 마을 전체의 경제적·내면적 삶의 질이 몇몇 업자들에 의해 좌우됐다.
또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농협 역시 중개업자나 다름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농협은 밤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밤을 중개업자들이 그날그날 정하는 가격으로 수매해서 업자들에게 넘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농부들이 볼 때 농협은 밤을 취급하는 중개업자들이나 다름없다.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업자들과 함께 농부들을 착취하는 구조에 안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0년이다. 함양군에서도 백전면과 병곡면이 밤의 주요 산지가 된 지 50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함양군에는 밤과 관련된 가공 센터나 밤의 유통에 관한 공익적 기관이 전혀 없다. 물론 밤이라는 작물을 부업 정도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농민들의 잘못도 있다. 하지만 함양군 같은 국가 기관이나 농협 같은 준국가 기구가 밤과 관련해서 아무런 인프라도 구축해 놓지 않은 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상 직무유기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2020년의 밤농사 결과는 최악이었다. 2019년 당시 더 이상 바닥을 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함양농협 백전지점의 밤 매입 실적표에 따르면 2016년 백전면에서 매입한 밤은 360t이었고, 2019년에는 189t, 2020년에는 104t이었다. 나와 남편이 한 달 넘게 산을 돌아다니며 밤으로 번 돈은 고작 250만 원이 조금 넘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벼랑에 엄지손가락 두 개로 매달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마을 기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