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33

박재혁, 마침내 부산으로 돌아오다

등록 2021.04.29 11:46수정 2021.04.2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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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9월 6일 박재혁은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오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부터 형사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고 조선인들은 몸과 짐 수색을 당했다. 당시 소설가 염상섭은 <만세전>에서 부산항에 하선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배에서 끌어내린 층층다리가 선창 위에 걸리니까. 앞장을 서서 올라오는 것은 흰 테를 두른 벙거리지를 쓰고 외투를 입은 '순사보'와 육혈포 줄을 어깨에 늘인 일본 순사하고, 누런 복장에 역시 육혈포의 검은 줄을 늘인 헌병들이다. 그리고 올라오는 길로 배에서 내려서는 어귀에 좌우로 지키고 서고, 가 다음에 이쪽저쪽으로 승객이 지나쳐 나가는 길의 중에도 지키고 섰다. 이렇게 경관과 헌병이 소정한 자리에 서니까, 그제서야 일・이등 승객이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교통차단을 당한 삼등객은 배 속에 긷힌 포로 모양으로 매우 부러운 듯이 모든 광경을 바라본 보고 섰었다.

… 무슨 죄나 진 듯이 층계에서 한 발을 내려디딜 때에는 뒤에서 외투자락을 잡아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열 발짝을 못 떼어놓아서 층계의 맨 끝에는 골독히 위만 치어다보고 섰는 네 눈이 있다. 그것을 육혈포도 차례로 못 간 순사보와 헌병보조원의 눈이다. 그 사람들은 물론 조선사람이다. … 될 수 있으면 일본사람으로 보아달라고 속으로 빌면서. 유학생으로, 조선사람으로 알면 붙들리기 때문이다. … 파출소에 들어가면 막연한 공포와 불안에 말이 어눌해지기 마련이다."

부산으로 돌아온 박재혁이 바라본 부산은 예전의 부산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가 바라본 부산 그 자체였다. 조선을 축사(縮寫)한 것, 조선을 상징하는 곳인 "부산의 팔자가 조선의 팔자요, 조선의 팔자가 부산의 팔자이었다." 부산은 식민지 조선의 관문이면서 그런 만큼 철저하게 통제되고 감시되는 곳이었다. 부산은 일제의 조선 침략과 조선인 수탈의 전초기지였다.
 
1920년대 부산 중구 중앙동 제1잔교_부두와 관부연락선 신라환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으로 부산(釜山)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 사이에 정기 연락선이 운행되었다. 이제 일본은 조선을 거쳐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대략 3천만 명의 승객이 관부연락선을 이용하였다.
1920년대 부산 중구 중앙동 제1잔교_부두와 관부연락선 신라환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으로 부산(釜山)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 사이에 정기 연락선이 운행되었다. 이제 일본은 조선을 거쳐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대략 3천만 명의 승객이 관부연락선을 이용하였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항구에서 내려 조선 거리로 갔다. 부두를 뒤에 두고 서편으로 꼽들어서 전찻길을 끼고 큰길을 암만가야 좌우편에 이층집이 쭉 들어섰을 뿐 조선사람의 집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간혹 보이는 납작한 조선가옥은 흙 담벼락을 헐고 일본식 창틀을 박았다. 이처럼 집들은 일본식으로 개조되고 편리성에 따라 조선식 문화는 사라지고 있었다. 함부로 이은 허술한 일본식 이층집이 좌우편에 5~6채씩 늘어 섰는 것이 조선사람 집 같지는 않으나 이 문 저 문에서 들락거리는 사람은 조선사람이었다. 

전차가 개통되고 사미센 소리가 나는 요릿집이 늘어나 있었고, 온돌은 다다미로, 석유 불이 전등불로 바뀌었다. 조선사람 중에 조선 사람 같지 않은 혼혈아들도 보였다. 부산진과 달리 부산부의 대다수 땅은 일본인 지주의 소유로 집세의 폭등과 심각한 주택난을 초래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도심지에서 변두리로 쫓겨나고 생활문화는 일본화가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의 부산은 일본의 부산으로 확연히 바뀌고 있었다. 국권 상실된 식민지 조선은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보이는 억압과 속박의 사회였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박재혁 자료 - 사진의 부산경찰서는 박재혁이 투탄한 경찰서가 아니다. 아래 부산일보 호외는 친구 오택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박재혁과 관련한 많은 기록이 오류 상태로 있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박재혁 자료- 사진의 부산경찰서는 박재혁이 투탄한 경찰서가 아니다. 아래 부산일보 호외는 친구 오택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박재혁과 관련한 많은 기록이 오류 상태로 있었다. 천안 독립기념관
 
7일 아침에 돌연 박재혁이 오택의 집을 방문하였다. 오택에 따르면, 재혁은 일본 나가사키(장기, 長崎)를 거쳐 화물선을 타고 부산에 상륙했다고 한다. 그는 행장이라고는 중형 가방 한 개뿐이었다. 다소 피곤한 기색이 보였고 몸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택아! 잘 있었나. 이것 하나 부탁하자."

박재혁은 소포 한 개를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꺼내며 천장 속에 숨겨두라고 신신부탁하였다. 오택은 재혁의 행동이 예전과 달리 수상하게 보였다.

"박형, 이게 뭔데!"
"나중에 밤에 와서 알려줄게. 먼저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야겠어!"


재혁은 밤에 와서 말하겠다고 하고 갔다. 모친을 뵙고 밤에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박재혁이 없던 시절에 이사를 한 곳은 부산진성의 일부인 자성대 근처였다. 자성대는 부산진성의 아들 성(子城)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첨사진(僉事鎭) 내의 산 정상에 자성(子城)을 만들고 장대(將臺)로 삼았기 때문에 자성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1592년 일본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곳에 주둔했기 때문에 고니시성[少西城], 또는 일본성의 모양을 보고서 마루야마성[丸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이 주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만공대(萬公臺)라고도 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수백 년이요, 옛 성은 군사적으로 의미가 퇴색되어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1919년 6월 27일 이사한 범일동 550번지 모친의 새집은 자성대와 부산진 시장이 가까웠다. 하지만 집은 예전보다 작았고 궁색하게 보였다. 현재 이 집을 기준으로 "박재혁의 거리"가 만들어졌지만 실상 박재혁이 이 집에 산 적은 없다. 범일동 출생지는 정공단 친구들 집과 가까웠지만, 이곳은 한참 떨어져 낯설었다. 하지만 그가 타국으로 갈 때 박국선에게 돈을 빌려고 모친이 그 돈을 갚기 위해 생가를 판 탓이기에 불평이나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외할머니도 같이 있으니 좁은 집을 더 비좁게 여겨졌다. 재혁은 조심스럽게 모친에게 말했다.

"어무이, 제가 나라를 위해 일 좀 해야겠어요."
"뭔 말이고. 독립운동하겠다는 것이?"
"예!"
"안된다. 너는 나와 명진이만 남겨두고 남의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앞으로도 그렇겠다는 것이냐, 안 된다."
"어무이, 저도 알아요.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어디 조선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도 없잖아요. 온통 왜놈들이 눈을 부라리며 자기 나라처럼 행세하는 꼬라지는 도저히 볼 수가 없어요."



두 사람의 심각한 대화에 명진이는 눈만 말똥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박재혁은 부산으로 돌아왔지만 바로 자기 어머니와 누이의 청에 못 이겨 곧 실행치 못했다. 재혁은 모친의 "안 된다."라는 그 말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부모에게는 불효지만 나라에는 애국해야 하는 결단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만세운동 이후 전국에서 잡힌 사람들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는 고통의 소리가 팔도에 가득하고, 잡혀간 가족의 통곡 소리가 하늘에 울리고, 일제의 만행은 거칠 줄을 모르고, 친일 부왜인들을 거리를 활개 치고, 지나간 역사에 반성할 줄 모르는 지식인들은 여전히 아부만 하는 시절이었다. 누군가 폭뢰를 터뜨리듯 일깨워야 했다. 대한의 사람이 여전히 살아있음의 기개를 보여주어야 했다. 

1919년 9월 2일 3·1 운동 독립투쟁의 열기가 채 가라앉기 전의 서울 남대문 역에서 또 한 번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있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에게 던진 폭탄은 그 자체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거사의 주인공은 65세 노인인 강우규였다. 강우규의 폭탄 투척은 3·1 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 투쟁이다. 이러한 충격이 식민지 조선에 또 필요한 시절이었다.

박재혁, 조선총독부에 투탄하려 하다

오택은 자기 집에 재혁이 온다고 했지만 궁금했다. 실상 박재혁이 갑자기 와서 물건을 맡기고 할 때까지는 태연무심(泰然無心)한 척하였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으려니 짐작하니 마음에 비장감이 들었다. 잠시 자성대를 한 바퀴 돌고 박재혁의 집으로 찾아갔다.

"택아. 실은 작년 겨울 만주 길림에서 의열단이 조직되었어. 단장은 김원봉이라네."
"의열단! 혹시 이번 밀양폭탄사건에 적발된 사람들 아니가?"
"맞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행동을 하다 보니 일경이 눈치를 챈 거 같아!"
"실상 자네에게 맡긴 것이 폭탄이라네."
"그럴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네."


오택의 집에 맡긴 것은 폭탄이었다. 하지만 이 폭탄을 숨긴 장소에 대해서는 세 가지가 있단. 최천택의 당숙모인 변봉금(卞鳳今, 1880~1958) 여사 집에 감추었다는 설이 있다. 변봉금이 간장독에 숨겨서 왜경(일본경찰)이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투탄 거사 이후 박재혁은 자기 집에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오택의 집에 숨겼다는 것은 오택의 기록이다.

변봉금 여사는 서울(경성) 하숙집의 학생들이 만세운동으로 체포되고 외동딸 박수련이 18세 갑자기 죽자 1920년 고향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친정 남동생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 오자 박희창(朴喜昌, 朴喜鳳, 1899~1950) 등이 성금을 모금하여 수영에 집 한 채를 장만해 주었다. 박희창은 박수련과 짝을 지어주려 한 사윗감이었다. 박희창은 서울 삼일운동 후 1920년 6월 조선청년회연합회 발기인으로 활동 중이었다. 

수영 집은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강홍렬(姜弘烈, 1924년 의열단 제3차 폭동 관련자), 경북의열단 사건 관련), 박희창은 수영으로 이사해서 살았고, 최천택과 김범부(金凡父, 1896~1966, 불교철학자), 이기주(李基周, 1899년생, 양산독립만세운동, 1960년 초대 민선 경남도지사) 등이 드나들었다.

박재혁이 변봉금 여사 집에 폭탄을 맡기고 간 뒤 사복경찰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온 집을 뒤졌다. 여사를 꼼짝 못 하게 하고 난 뒤 벽장, 부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들추었으나 아무런 꼬투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변 여사가 폭탄을 간장독 속에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폭탄을 밀봉하여 간장독 속에 숨겨둔 것은 기상천외한 방식이지만 폭탄 사용에는 긍정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습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사 이후에 발견된 폭탄의 흔적으로 보면 오택의 집에 보관된 듯하다. 실상 변봉금 여사 집에 폭탄을 맡기는 것은 등잔불 아래가 어둡다는 속설을 이용한 것일지 모르나 폭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진짜 폭탄은 누가 숨겼을까? 박재혁의 진술은 정공단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 진술이었다. 변봉금의 집에 숨겼다는 것은 변봉금의 직접 진술이 아니라 박원표(朴元杓)의 증언이다. 그것은 폭탄 현장에 발견한 폭탄을 싼 헝겊으로 보면 오택의 집에 숨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상옥의 폭탄  독립운동가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할 때 사용하고 남은 폭탄 6점. 당시의 폭탄 종류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김상옥의 폭탄 독립운동가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할 때 사용하고 남은 폭탄 6점. 당시의 폭탄 종류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독립기념관
 
박재혁과 오택은 밤이 깊도록 귀국한 목적에 대해 의논하였다.

"의열단의 첫 번째 거사는 실패했어.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 했었다네. 내가 미완의 거사를 완성해야 할 것 같아."
"음, 너무 무리가 아닐까. 서울은 경계가 삼엄하다네. 저번 미국의원단 방문 당시 경찰의 치안유지가 대단했다네. 그리고 대부분 거사 직전에 체포되기도 했지."
"그래서 단독으로 거사를 치를까 생각하네."
"단독 거사는 성공 가능성이 크지만 그만큼 위험도 감수해야 할 걸세. 그런데 모친은 이 사실을 아는가."
"귀띔은 했지만, 하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일세. 이럴 때 외동아들인 것이 그렇네."
"모친이야 당연하지 않겠나. 하나뿐인 아들인데. 그나저나 박형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나 당분간 좀 쉬면서 계획을 짜야겠네."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에 투탄하라"라는 김원봉과 달리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 하였다. 김원봉은 평소 "조선 총독을 계속해서 대여섯 명 죽이면 후계자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도쿄를 공포에 떨게 하면 일본 국민 스스로 통치를 포기할 것이다."라는 말을 헸다. 조선총독부 투탄은 거사 중의 거사였다. 그렇게 된다면 거사는 국내적인 사건이 아니라 세계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조선총독부 폭파는 분명 세계적 뉴스가 될 것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님을 오택과 박재혁은 생각했다.

박재혁은 의열단의 이름처럼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조선 땅에 살고 싶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조차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혁은 조선총독부 투탄하고자 하였다. 이왕이면 작은 일이 아니라 큰일에 자신을 헌신하고 싶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투탄은 1년 후인 1921년 9월 의열단원 김익상에 의해 이루어졌다. 거사에 앞둔 단원들이 그에게 <사기(史記)>의 <자격열전>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읊으며 의기를 돋구었다. 

"장사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리." 

그러자 김익상은 "무슨 소리! 일주일이면 돌아오리라"하며 호기롭게 응수했다고 한다. 그는 폭탄 두 개와 권총 두 자루를 가지고 일본인 행세를 하며 국내에 잠입하였다. 9월 12일 오전 10시경, 조선총독부에 전기 수리공을 위장하여 들어가 2층에 폭탄을 던졌다. 유유히 빠져나온 그는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17일 북경에 도착했다. 그는 정말 1주일 만에 돌아온 것이다.

외국 생활에 박재혁은 심신이 지쳐 당분간 휴양이 필요했다. 일단 거사보다는 박재혁이 그동안 외국 생활로 지친 심신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분간 건강을 회복하고 기다려 유효 적절히 행사하기로 하며 내일부터 동래 온천이나 해운대 온천에서 휴양하기로 하였다. 오택은 다음날 정양비 1천 원을 제공하고 상경 여비를 충분히 준비하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박재혁을 만난 오택은 미국행 계획을 단념하였다. 박재혁이 옥사한다면 자기 혼자 잘살겠다고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오택은 최천택, 김영주와 함께 동래 온천으로 정양하러 떠났다. 실제 박재혁의 건강 상태는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8월 중에 일본에 여러 번 드나들며 규슈대학 병원을 방문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휴양은 핑계일 뿐 실제 거사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다. 죽을지도 모른다. 산다고 하여도 왜경(일본경찰)의 고문을 감당해야 한다. 사건이 일어난 뒤에 남겨진 가족은 누가 돌봐야 하는가 등 고민되는 고통스러움이 물밀듯이 박재혁에 왔을 것이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의열단 #박재혁 #오택 #김영주 #최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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