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박재혁 자료- 사진의 부산경찰서는 박재혁이 투탄한 경찰서가 아니다. 아래 부산일보 호외는 친구 오택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박재혁과 관련한 많은 기록이 오류 상태로 있었다.
천안 독립기념관
7일 아침에 돌연 박재혁이 오택의 집을 방문하였다. 오택에 따르면, 재혁은 일본 나가사키(장기, 長崎)를 거쳐 화물선을 타고 부산에 상륙했다고 한다. 그는 행장이라고는 중형 가방 한 개뿐이었다. 다소 피곤한 기색이 보였고 몸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택아! 잘 있었나. 이것 하나 부탁하자."
박재혁은 소포 한 개를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꺼내며 천장 속에 숨겨두라고 신신부탁하였다. 오택은 재혁의 행동이 예전과 달리 수상하게 보였다.
"박형, 이게 뭔데!"
"나중에 밤에 와서 알려줄게. 먼저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야겠어!"
재혁은 밤에 와서 말하겠다고 하고 갔다. 모친을 뵙고 밤에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박재혁이 없던 시절에 이사를 한 곳은 부산진성의 일부인 자성대 근처였다. 자성대는 부산진성의 아들 성(子城)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첨사진(僉事鎭) 내의 산 정상에 자성(子城)을 만들고 장대(將臺)로 삼았기 때문에 자성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1592년 일본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곳에 주둔했기 때문에 고니시성[少西城], 또는 일본성의 모양을 보고서 마루야마성[丸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때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이 주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만공대(萬公臺)라고도 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수백 년이요, 옛 성은 군사적으로 의미가 퇴색되어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1919년 6월 27일 이사한 범일동 550번지 모친의 새집은 자성대와 부산진 시장이 가까웠다. 하지만 집은 예전보다 작았고 궁색하게 보였다. 현재 이 집을 기준으로 "박재혁의 거리"가 만들어졌지만 실상 박재혁이 이 집에 산 적은 없다. 범일동 출생지는 정공단 친구들 집과 가까웠지만, 이곳은 한참 떨어져 낯설었다. 하지만 그가 타국으로 갈 때 박국선에게 돈을 빌려고 모친이 그 돈을 갚기 위해 생가를 판 탓이기에 불평이나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외할머니도 같이 있으니 좁은 집을 더 비좁게 여겨졌다. 재혁은 조심스럽게 모친에게 말했다.
"어무이, 제가 나라를 위해 일 좀 해야겠어요."
"뭔 말이고. 독립운동하겠다는 것이?"
"예!"
"안된다. 너는 나와 명진이만 남겨두고 남의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앞으로도 그렇겠다는 것이냐, 안 된다."
"어무이, 저도 알아요.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어디 조선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도 없잖아요. 온통 왜놈들이 눈을 부라리며 자기 나라처럼 행세하는 꼬라지는 도저히 볼 수가 없어요."
두 사람의 심각한 대화에 명진이는 눈만 말똥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박재혁은 부산으로 돌아왔지만 바로 자기 어머니와 누이의 청에 못 이겨 곧 실행치 못했다. 재혁은 모친의 "안 된다."라는 그 말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부모에게는 불효지만 나라에는 애국해야 하는 결단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만세운동 이후 전국에서 잡힌 사람들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는 고통의 소리가 팔도에 가득하고, 잡혀간 가족의 통곡 소리가 하늘에 울리고, 일제의 만행은 거칠 줄을 모르고, 친일 부왜인들을 거리를 활개 치고, 지나간 역사에 반성할 줄 모르는 지식인들은 여전히 아부만 하는 시절이었다. 누군가 폭뢰를 터뜨리듯 일깨워야 했다. 대한의 사람이 여전히 살아있음의 기개를 보여주어야 했다.
1919년 9월 2일 3·1 운동 독립투쟁의 열기가 채 가라앉기 전의 서울 남대문 역에서 또 한 번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있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에게 던진 폭탄은 그 자체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거사의 주인공은 65세 노인인 강우규였다. 강우규의 폭탄 투척은 3·1 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 투쟁이다. 이러한 충격이 식민지 조선에 또 필요한 시절이었다.
박재혁, 조선총독부에 투탄하려 하다
오택은 자기 집에 재혁이 온다고 했지만 궁금했다. 실상 박재혁이 갑자기 와서 물건을 맡기고 할 때까지는 태연무심(泰然無心)한 척하였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으려니 짐작하니 마음에 비장감이 들었다. 잠시 자성대를 한 바퀴 돌고 박재혁의 집으로 찾아갔다.
"택아. 실은 작년 겨울 만주 길림에서 의열단이 조직되었어. 단장은 김원봉이라네."
"의열단! 혹시 이번 밀양폭탄사건에 적발된 사람들 아니가?"
"맞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행동을 하다 보니 일경이 눈치를 챈 거 같아!"
"실상 자네에게 맡긴 것이 폭탄이라네."
"그럴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네."
오택의 집에 맡긴 것은 폭탄이었다. 하지만 이 폭탄을 숨긴 장소에 대해서는 세 가지가 있단. 최천택의 당숙모인 변봉금(卞鳳今, 1880~1958) 여사 집에 감추었다는 설이 있다. 변봉금이 간장독에 숨겨서 왜경(일본경찰)이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투탄 거사 이후 박재혁은 자기 집에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오택의 집에 숨겼다는 것은 오택의 기록이다.
변봉금 여사는 서울(경성) 하숙집의 학생들이 만세운동으로 체포되고 외동딸 박수련이 18세 갑자기 죽자 1920년 고향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친정 남동생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에 오자 박희창(朴喜昌, 朴喜鳳, 1899~1950) 등이 성금을 모금하여 수영에 집 한 채를 장만해 주었다. 박희창은 박수련과 짝을 지어주려 한 사윗감이었다. 박희창은 서울 삼일운동 후 1920년 6월 조선청년회연합회 발기인으로 활동 중이었다.
수영 집은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강홍렬(姜弘烈, 1924년 의열단 제3차 폭동 관련자), 경북의열단 사건 관련), 박희창은 수영으로 이사해서 살았고, 최천택과 김범부(金凡父, 1896~1966, 불교철학자), 이기주(李基周, 1899년생, 양산독립만세운동, 1960년 초대 민선 경남도지사) 등이 드나들었다.
박재혁이 변봉금 여사 집에 폭탄을 맡기고 간 뒤 사복경찰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온 집을 뒤졌다. 여사를 꼼짝 못 하게 하고 난 뒤 벽장, 부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들추었으나 아무런 꼬투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변 여사가 폭탄을 간장독 속에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폭탄을 밀봉하여 간장독 속에 숨겨둔 것은 기상천외한 방식이지만 폭탄 사용에는 긍정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습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사 이후에 발견된 폭탄의 흔적으로 보면 오택의 집에 보관된 듯하다. 실상 변봉금 여사 집에 폭탄을 맡기는 것은 등잔불 아래가 어둡다는 속설을 이용한 것일지 모르나 폭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진짜 폭탄은 누가 숨겼을까? 박재혁의 진술은 정공단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 진술이었다. 변봉금의 집에 숨겼다는 것은 변봉금의 직접 진술이 아니라 박원표(朴元杓)의 증언이다. 그것은 폭탄 현장에 발견한 폭탄을 싼 헝겊으로 보면 오택의 집에 숨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