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파 비스타 필름의 현재 판매가
한지민
코닥이 필름 사진의 부흥에 힘입어 단종된 필름을 재생산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필름은 비싸다. 이전보다 약 1.7배~2.3배 정도의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좀 더 비싼 필름은 한 롤에 만 원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군것질할 돈을 아껴 필름 한 통을 샀던 중학생은 밥 먹을 돈을 아껴야만 필름을 살 수 있는 대학생이 되었다.
아날로그, 디지털로 재해석하다
필름이 하도 비싸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체재를 찾을 수밖에 없어졌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필름 카메라 느낌 사진 앱'이 떠올랐다. '필름의 박스 색깔은 그 필름이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색'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같은 사진을 찍어도 사용하는 필름에 따라 사진의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이러한 특징에 맞게 필름 카메라 앱들은 필름의 이름을 딴 다양한 필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직접 사용해보니, 억지로 넣은 빛샘 현상(필름실에 빛이 새어들어와 발생하는 현상)과 부자연스러운 노이즈 탓에 이도 저도 아닌 결과물이 나왔다. 필름 사진의 특징은 잘 나타냈으나, 모든 사진에 획일적으로 필터를 적용해버리니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가 봐도 '필름 느낌 필터'로 찍은 느낌이 생경했기 때문에 필름을 완벽하게 대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나는 대체재를 찾지 못한 채 눈물을 머금고 필름을 사는 쪽을 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전에 사용하던 사진 보정 앱 'VSCO'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VSCO의 멤버십을 구독하면 필름 필터인 'Film X'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다른 필름 카메라 앱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VSCO의 필름 필터는 달랐다. VSCO의 목표는 필름에 '충분히 가까운' 필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 필름과 구별이 되지 않는 필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냉동고에 엄청난 양의 필름들을 모아놓고 연구를 시작했다. 필름 모델을 개발하는 기본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필름을 Zeiss 50mm 렌즈를 이용하여 캐논 EOS 3 SLR에 로드한다.
2. 암실에서 전체 범위 가시광선 스펙트럼, 색상 조합 및 다양한 피부 톤을 포함하도록 특별히 선별된 테스트 차트와 씬(scene)을 촬영한다.
3. 습식 실험실(wet lab)에서 필름을 현상한다.
4. 측정 시스템을 통해 필름을 측정한다.
5. Frontier 또는 다른 스캐너를 사용하여 필름의 프레임을 스캔한다.
6. 데이터를 색채학, 통계, 머신 러닝의 조합을 사용하여 염료 밀도 및 필름 스펙트럼 감도를 포함하는 맞춤형 필름 스펙트럼 특성 파악 소프트웨어로 분석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필름이 빛 자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디지털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디지털카메라로 아무 장면이나 찍으면, 필름 모델이 동일한 장면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결과를 VSCO 앱의 필터로 변환시킨 결과물이 바로 'Film X'다.
VSCO의 Film X는 '적당히 필름 느낌을 내는 것'에 그쳤던 다른 앱과는 다르다. 필름이 빛의 파장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물리적 모델(스펙트럼 모델)을 직접 구축해냄으로써 완벽하게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재해석'해 낸 것이다.
이러한 시도 덕에 우리는 '필름'이라는 아날로그적 매체를 '앱'이라는 디지털 매체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래도 필름의 느낌은 필름 자체의 물성에서 나온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시간이 흐르고 필름이 지난 시대의 특징이 되었듯, 디지털로 구현된 아날로그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한 모습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때는 '디지털로 구현된 아날로그'도 그것만의 물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고향을 찾아 돌아오는 연어처럼 사람들은 다시 아날로그로 회귀한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지쳐버린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이전 시대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팽배해 있었다면, 지금은 지나간 것들이 팔리는 시대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멈춰 있는 시간에서 안정감을 찾으려 한다. 설사 그것이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시대의 산물이래도 상관없다. 이러한 모습을 보니 한 영화 평론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
- 영화 평론가 이동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참고 문헌]
VSCO Engineerig, VSCO Film X & The Imaging Lab, 2021.04.27 접속,
http://medium.com/vscoengineering/vsco-film-x-the-imaging-lab-619b50aeff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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