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태 세계일주무전기행 사진밀양에서 영남루를 배경으로 좌측부터 김인태, 왕치덕, 오택(가장 오른쪽)이다. 이들은 해방 후 김원봉과 같이 사진을 남겼다. -사진출처 :부산출신독립투사집(1983)
부산출신독립투사집(1983)
오택이 송태관을 처단 대상으로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송태관이 구(舊) 한국말 이토 히로부미와 고종황제 간의 통역으로 출세하여 내장부향(內藏副鄕-시종원 부원)까지 승진하였다. 양무호(揚武號) 군함 매수 때 구전(口錢-거래수수료) 30만 원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 파면되어 귀향하였다. 그 후 무산자를 착취하여 왜정에 아부하여 자진 권세를 부리다가 기미운동이 봉기하자 공포증이 나서 항상 은신하여 자기 집에 즉시 특설 전화를 설치하였다. 당시 부산진은 우체국 이외에는 전화가 없었다. 매일 전화로 부산경찰서에 부산진 동태를 보고하는 동시에 신변 보호를 청하여 순사가 간혹 그의 집에 투숙하기도 했다.
오택이 송태관을 사형 처단토록 추천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친일 반동에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륜과 인류에 위배됨이 비일비재하였고 무산자 착취가 극심하여 언양 소작인에게 철편을 맞아 반죽음(半死) 당한 자이기에 지정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처단은 13도 간부가 아닌 별동대에게 일임하였다. 13도 간부회의는 전연 집행에는 관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피차 면식도 없게 하였다. 이는 조직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별동대는 만주의 협객(俠客)을 불러오기로 하였다.
그런데 오택이 처단자로 추천한 송태관은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이었을까? 그는 양무호 매입 과정에서 구문을 받아 관직에서 쫓겨났을까? 과연 친일 부왜인이고 무산자를 착취한 자본가였을까?
친일 민족자본가의 삶, 어땠을까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양등마을 출신인 송태관(宋台觀, 1874~1941)은 부친이 11살 때 사망하여, 조모인 평산 신씨가 어린 손자를 업고 선대 묘를 돌보며 키웠다고 한다. 그는 1895년 설립된 부산의 개성학교를 1898년 3월 2회 졸업하고, 1898년 학교 전액 장학금으로 동경상업고등학교에 유학을 갔다. 당시 울산의 김홍조는 1900년부터 1907년까지 동경에서 박영효와 같이 지내고 있었다. 당시 김홍조가 지원한 울산 유학생 중의 한 명이 송태관일 가능성이 있다. 유학생들은 박영효 등 갑신정변으로 망명한 개화파 인사들과도 교류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송태관은 1905년 3월에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인 탁지부 주사로 관료 생활을 시작한다.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의 추천이었다. 메가타는 일본인 최초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인물로 대한제국 탁지부 고문으로 재정 및 경제적 합방을 주도한 인물이다. 송태관은 1906년 4월 토목건축주식회사(자본총액 25만 환, 발행주식 5천 주, 1주 액면가 50원)를 설립하였다. 당시 관료는 사적인 경제활동도 같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태관은 탁지부의 토지조사 사업에서 토목건축 사업으로 이권을 챙겼을 것이다.
송태관이 양무호 거래로 30만 원을 착복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1903년 4월 대한제국이 양무호를 도입한 가격이 총 55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쓰이 물산은 1894년 영국으로부터 25만 엔에 사들여 9년 동안 사용했었던 강철 증기 화물선을 200명 이상의 병사가 숙식할 순양함 또는 훈련함으로 개조하였다. 배는 장교를 위한 서양식 침구와 서양 요리기구를 구비하고, 사병 200명의 숙식을 위한 설비 그리고 대구경과 소구경 포 각 4문 등 무기를 설치하였다.
또 군함을 운항할 해군을 양성할 교관단까지 구성하여 인도하였으나 대한제국은 배를 인수하고도 3개월 뒤에 20만 원을 주고 잔액은 2년 동안 나눠 냈다. 이런 와중에 30만 원을 송태관이 중개 수수료를 받았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송태관은 그런 일을 할 시기나 위치에 있지 않았다. 양무호는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이었지만 도입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일제는 양무호를 강제로 뺏어가다시피 빼앗아 러일전쟁에 징발하었다. 자주 해군의 길은 첫 단추부터 시련 그 자체였다.
송태관은 1906년 1월 육군유년학교 교관에, 3월에 군부 번역관(軍部飜繹官)에 임용된다. 5월에는 궁내부 산하의 시종원 시종 주임관 4등에, 11월에는 종2품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임명되고, 칙임관 3등에 서임된다. 궁내부는 고종 시절 조선의 근대화를 총괄했던 곳이다. 송태관은 특사를 수행하여 일본에 가고, 일본에서 온 대신을 영접하였다. 일본어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통역을 한 사람 중에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다. 시종원 부경이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 차장의 지위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택은 이런 일로 인해 송태관을 이토의 통역관으로 오해한 듯하다.
현재 울산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통역관인 친일 매국노 송태관'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당시 일본의 공식적인 통역관은 고쿠부 쇼타로[國分象太郞]였다. 그는 박영효가 태극기를 만들어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어학생도(語學生徒)로 영접한 일본인이다. 1894년부터 조선에 건너와 일본공사관 통역관과 비서관을, 1905년 이후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해 통감부 비서관을, 1910년 한일합방 시에는 조선총독부 인사국장, 중추원 서기관장을 맡았다.
1907년 7월 20일 고종황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 등으로 일본의 압박을 받아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는 일이 발생했다. 7월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으나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아 식을 거행할 수가 없었다. 양위식을 거부하고 황태자 대리예식에 불참한 박영효와 시종원 관료는 유배형에 처했다. 박영효는 제주도로, 송태관은 진도로 유배당했다. 오택이 말한 양무호 때문에 송태관이 파직당한 것은 아니다. 송태관은 2년 5개월의 짧은 관료 생활은 이렇게 끝났다. 송태관은 시종원 부경으로 대한제국에서는 '훈 4등 태극장'을, 일본 황실에서는 '훈 3등 욱일장'을 받았다.
울산사람 송태관은 1909년 이후 부산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하였다. 1909년 구포저축주식회사 설립 주주로 참여한 후, 구포은행과 경남은행의 주주로 활동하며 1921년 8월 은행장(두취)에까지 오른다. 1919년 경남은행 마산지점장이 상해임정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이었다.
그런데 1910년대 그의 삶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1913년 9월 울산 언양에서 괴한의 습격으로 머리에 철봉을 난타당해 얼굴과 후두부가 파열되고 전신이 중상을 당해 생명이 위급하였다. 1915년 7월에는 울산 하상면 반구리 그의 집에 7인조 강도가 들이닥친 적도 있었다. 게다가 1915년 9월에는 사기, 무고, 횡령, 절도 등으로 3명에게 고발을 당하여 망신을 톡톡히 산 적이 있었다. 구속을 당하고 재판을 받은 그는 횡령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일본인 변호사는 동경에서 부산으로 와서 변호할 정도로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었다. 그는 재산이 수십만 원이요, 전답이 수십 정보에 달하는 부자였다.
1911년 매일신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 중 재산총액이 50만 원 넘는 사람이 32명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니 그의 부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울산 언양에서 수확한 곡식을 가마니로 한 줄 세우면 서울(경성)까지 이어진다고 촌로들은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부자였다. 아무튼 이 사건들로 송태관의 이미지는 대단히 부정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오택은 송태관을 처단할 친일분자로 무산자를 억압하는 자본가로 본 것이다.
1910년대의 일련의 사건으로 송태관은 치안이 유지되는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을 하였다. 1919년 이후 서울사(주)・송태정미소・조선제과(주)・동아신탁(주)・조선주조(주)・부산자동차(주)・삼산자동차(주)・부산신탄(주)・부산일보사(주)・(주)일본상업통신사 등을 설립하거나 투자하였다. 송태관은 1910년 전후로 대지주로 살아왔다면, 1919년부터 1920년까지는 집중적으로 회사를 설립하거나 투자하여 왕성한 경제활동을 벌였다. 이 사업 중에 울산의 김홍조와 경남은행, 삼산자동차, 조선제과는 같이 동업하였다.
송태관의 육영사업
1910년대 이후 사업을 하는 사람은 친일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경제적 친일이 정치적 친일과 연관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송태관은 경제활동 이외에 육영사업에도 관계했다. 1910년 2월 최해규가 설립한 언양의숙의 재정이 어렵게 되자 송태관은 현금 80원과 지필(紙筆) 4, 5원 가치를 기부하고 직접 찾아가 격려했다. 1911년 9월 공립울산보통학교의 학무위원이 되었다. 또 그는 부산상업학교 상의원으로 김홍조, 박영효 등과 같이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