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원단 동경 도착일본에 도착한 미국의원단을 일본 경찰의 삼엄한 호위 속에 있었고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았다. 출처 동아일보(1920.09.04.)
동아일보
미국의원단은 부산에서 출발하여 27일 하관(下関, 시모노세키), 28일 신호(神戶, 고베)와 대판(大阪, 오사카)을 거쳐 경도(京都, 교토)에 도착했다. 9월 2일 오후 8시에 많은 사람의 환영 중에 동경에 무사 도착하였다. 배일사상을 가진 조선사람들이 조선 내에서의 단속이 너무 심해 어떤 일도 할 수 없어 무슨 일이든지 계획하려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의원단이 동경에 들어오는 전후 약 1시간 동안 일본 경찰은 정복 순사 300명과 경시청의 사복 순사 400여 명이 엄중히 경계하였다. 정복 순사는 동경 정거장에서 제국호텔까지, 사복 순사는 정거장 구내와 호텔 내외를 경계하였다. 일본 경찰은 조선 학생보다 많은 중국 유학생을 더 경계하였다. 중국 학생 3,850명 중 한 사람도 배일사상을 품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삼엄 경계한 이유는 사전에 조선 유학생들의 비밀계획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경역에서 제국호텔로 향하는 도중에 태극기, 성조기, 한국독립청년단기를 높이 들고 의원단 탑승차에 향하려 하였던 동경 중앙대학의 홍승로(洪承魯, 24세)), 명규성(21세), 최창익(31세), 최규호(24세) 등이 검거되었다. 또 미국의원단의 일본 도착 후 조선 지방에서 하듯이 독립운동을 실행하려 하였고, 상해 임정에서 비밀사명을 띠고 온 약 40~50명과 기맥을 통하고 있었던 왕연동(王燕同, 동경학우회 회원, 25세), 이장천(李章天, 19세) 등 2인이 검거되고, 정준동(鄭準東)도 같은 계획을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중지하였다. 이들은 동경에 유학하는 조선 유학생 1천여 명으로 조직된 학우회 회원으로 중앙대학 한준동[정준동]을 중심으로 경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대오를 짜지 않고 정거장에서 호텔까지 늘어서 일제히 배일의 붉은 기(태극기일 것이다)를 휘두를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는 배일 중국 학생이 합력하였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동경도 삼엄한 경계를 일본 경찰은 하였다. 박재혁은 동경에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일본에서 단독으로 활동하여야 하므로 문제가 나타났다. 박재혁의 거사를 도와줄 어떤 동지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혼자 계획하고 혼자 실행하는 일은 쉬운 것 같지만, 투탄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의 수집과 함께 적지 않는 경비, 그리고 일제의 감시를 뚫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지만, 일본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거사를 진행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문제는 또 그가 일본어는 능숙하게 구사하였지만, 일본의 동경 지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실행 계획 짜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 체재 중이었던 미국의원단 일행은 9월 13일 오후 4시 미국 군함 그릿노든호로 귀국하였다. 박재혁은 거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미국의원단이 일본을 떠나기 전에 중국이나 부산으로 가야 했다. 훗날 신숙은 일본에서의 거사가 실행되지 못하여 부산경찰서 투탄을 하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8월 31일 김원봉으로부터 폭탄을 받았다"라는 진술은 박재혁이 동경에서 미국의원단에게 투탄하려던 계획을 숨기기 위한 거짓 진술일 수 있다.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이후 그의 행적을 찾으려 일본 경찰은 조사하였지만, 그의 동선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오리무중이었다. 그는 자기의 행적을 최소한 진술하였기 때문이었다.
거사를 포기한 박재혁은 중국이 아닌 부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박재혁의 짐보따리에는 거사를 위한 폭탄이 숨겨져 있었다. 박재혁은 폭탄을 수건에 싸서 트렁크 밑에 넣어 휴대하고 9월 6일 부산 도착 연락선을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나가사키(長崎)로 갔다. 그는 본래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下關)로 가서, 그곳에서 다시 연락선으로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나가사키에 상륙해서 알아보니 시모노세키로 가지 않고도 대마도(對馬島:이즈하라-嚴原港)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가는 배편이 있었다. 당시의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은 탈 때나 내릴 때나, 일제 형사들이 조선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위험하였지만, 대마도를 거쳐서 가는 배는 위험성이 적을 것 같았다. 앞으로 동지들이 이용하면 좋을 듯하여 봉함엽서를 보냈다.
"昨日安着長崎(작일안착장기), 商況甚如意(상황심여의), 此諸君惠念之澤矣(차제군혜염지택의), 秋初凉風(추초량풍), 心身快活(심신쾌활), 可期許多收益(가기허다수익), 不可期再見君顔(불가기재견군안), 別有商路比前益好(별유상로비전익호), 硏究則可知也(연구칙가지야). 一九二○・九・四 臥膽(와담) 拜(배)"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거래(상황)가 뜻대로 잘되고 있으니 이것이 모두 여러분들의 염려 덕분입니다. 초가을 바닷바람에 몸과 마음이 상쾌합니다. 아마도 좋은 일을 기약할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그대 모습을 다시 보기를 기약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별도로 다른 장삿길이 있어 그 전보다 더 좋을 듯합니다. 연구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920년 9월 4일 와담(臥膽) 배(拜)"
편지는 일본 경찰의 검열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평범한 상인의 편지처럼 보이도록 적었다. 하지만 편지 끝에 박재혁이 쓴 와담(臥膽)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줄임말이다. 거북한 섶에 누워 자고 쓴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으려 하거나 실패한 일을 다시 이루고자 굳은 결심을 하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단어는 의열단 1차 거사와 일본에서의 투탄 의거 실패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박재혁의 결의를 알 수 있는 말이다. 편지에 좋은 일이란 투탄의 성공을 의미한다. 하지만 거사가 끝나면 다시는 동지들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몸과 마음이 상쾌하다고 하였지만, 마음에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지들은 너무 염려하지 말고 거사의 성공은 민족해방은 앞당겨질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동지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위로하고 있다. 편지를 읽은 김원봉과 동지들은 눈물을 꾹 참았다.
편지 끝에 그는 ¨熱落仙他地末古 大馬渡路看多¨라고 14자의 문구를 덧붙였다. 그것은 암호(暗號)로 발음 그대로 "연락선(連絡船) 타지 말고 대마도(對馬島)로 간다"라는 내용이었다. 장기에서 하관을 가서 연락선을 이용하기보다는 대마도를 경유하는 경로가 부산 입국에 유리함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박재혁은 감시가 심한 관부연락선을 타려던 계획을 바꿔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에 잠입했다.
훗날 신숙은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에 대해 "아. 박 군이여. 동지로 더불어 한번 희생을 결정한 이상 약속한 대로 희생한 것만은 장부의 신의 상 일대 쾌거라 할 수 있으나, 오직 목적물이 아닌 다시 말하면 큰 범을 잡고자 하다가 적은 고양이도 못 잡고 고귀한 생명만을 희생한 것이야말로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이며, 이 어찌 천추의 한사(恨事)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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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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