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행궁의 두번째 문인 좌익문화성 행궁은 전국의 수많은 행궁중에서 그 규모는 물론 격식도 최대한 왕궁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 일례로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에 가기 위해서는 3개의 문인 신풍루, 좌익문, 중양문을 통과해야 한다.
운민
수원 화성의 핵심 공간인 화성행궁은 겉에서 보았을 땐 여느 관아 건물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그 격식이나 품격이 마치 궁궐의 축소판을 본 듯하다. 화성행궁은 건립 당시 21개의 건물 576칸의 규모로 지어졌고, 조선 행궁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정조 이외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도 화성행궁을 찾을 정도로 의미가 남다른 행궁이었지만 일제의 파괴를 피해 가지 못했다.
일제는 궁궐은 물론 예전에 관아로 쓰이던 곳을 집중적으로 훼손시켰는데 전각을 부순 자리에는 주로 관공서나 학교가 들어섰다.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 낙남헌, 화령전 등의 일부 전각만 남긴 채 거의 전 건물이 헐리는 아픔을 겪었다.
행궁의 터에는 수원시의 각종 관공서와 신풍초등학교 등 많은 시설들이 들어섰었다. 하지만 1997년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계기로 하여 화성행궁의 전각들은 다시 예전 모습을 찾게 되었고,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현재는 2단계 복원공사가 한참 진행 중인데 행궁 권역 내에 있던 11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풍초등학교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마찰이 있었지만 광교신도시로 학교를 옮기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우화관을 다시 복원하고 있다. 원래는 2020년 복원 완료 예정이었지만, 2021년 3월 말 기준 발굴조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듯했다.
신풍루를 거쳐 좌익문, 중양문을 지나 중심 전각이라 할 수 있는 봉수당으로 이어지게 된다. 경복궁, 창덕궁처럼 거대한 규모라 보기 힘들다. 하지만 건물 주위에는 회랑이 둘러쳐 있었고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전으로 이어지는 구조와 격식 있는 붉은 단청이 이곳이 궁궐임을 깨닫게 한다.
정조가 집무를 보는 모습까지 재현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