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예술 영화 <우리 집 이야기>통일부 북한자료센터로부터 교내 상영 허가를 받았습니다. 내블통이 출범한 날, DVD를 담은 소포가 도착했습니다.
서부원
학교 곳곳에 게시물도 만들어 붙이고, 수업 시간마다 열심히 홍보했지만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 이 와중에 무슨 통일 교육이냐며 하나같이 생뚱맞다는 표정이었다. 고작 관심을 보인 아이도 활동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기재할 수 있는지부터 물었다.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되면 하겠다는 뜻이다.
스스로 들떠 동아리 가입 신청서를 수십 장 미리 출력해놨는데, 애꿎은 종이만 낭비한 꼴이 됐다. 고민해보겠다며 가져간 아이는 모두 11명, 제출한 경우는 달랑 5명이다. 그나마 2명 빼고는 제출한 신청서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가입하려는 이유를 '김정은 처단'이나 '북한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라고 적은 아이도 있었다.
결국, 직접 '영업'에 나섰다. 수업 시간 눈에 띈 각 학급 아이들을 개별 면담하면서 가입을 종용했다. 통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북한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이들을 설득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장 대학 입시 준비에 지장을 줄 거라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대학 입시에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는 아이라면 애초 배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은 2024학년도 대학 입시부터 자율 동아리를 비롯한 비교과 영역의 활동 내용이 전형자료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사실 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면, 함께하는 다른 이들의 의욕만 꺾게 만든다.
일단 독서 모임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아이들도 책을 정기적으로 읽은 뒤 감상을 나누는 가벼운 모임에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더욱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활용해서 모일 계획이라고 했더니, 잠깐 머리도 식힐 겸 괜찮겠다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북한에 관해서라면 왠지 자극적인 내용일 거라는 편견도 작용하는 것 같았다.
흔히 '영상 세대'라며 뭉뚱그리지만,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함께할 책을 무제한 공짜로 제공한다고 공지했더니, 아이들이 한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건은 딱 하나, 정기적인 독서 모임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역지침 상 모임을 비대면 원격 방식으로 진행할 수도 있고, 불참 시에는 감상문을 제출하도록 했다.
아이들과 나눌 북한 이야기
지난 4월 9일, 회원 6명, 준회원 6명, 교사 3명, 이렇게 15명으로 동아리가 출범했다. 여기서 준회원이란 동아리 가입 신청서를 미제출한 경우이거나 한두 번 모임에 참여한 뒤 그때 가서 결정하겠다는 아이들이다. 일단 한국사 교사 2명과 행정실 직원 1명이 함께하는데, 앞으로 교사들의 참여도 독려할 계획이다.
첫 번째 책은 임종진 전 <한겨레> 사진 기자가 쓴 <평화로 가는 사진 여행>으로 정했다. 책에 대해서는 지난 연재 글을 통해 나름 자세히 소개했다. 한 아이에게 슬쩍 보여주었더니, 이 책이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것 같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내 동네 책방에 동아리 홍보를 위한 몫 5권을 포함해 총 20권을 주문했다.
책이 도착하면 아이들에게 배포되고, 구체적인 모임 일시가 정해질 것이다. 책을 읽은 뒤 만나 아이들과 나눌 북한 이야기는 어떨지 상상만 해도 설렌다. 모임 때 나눈 이야기와 제출한 소감문 등은 학년말에 소책자로 한데 묶어낼 요량이다. 조촐하나마 1년 동안 북한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여주는 징표가 될 것이다.
회원들에겐 별도의 임무도 있다. 자신의 소감과 모임 때 나눈 이야기들을 다른 친구들과 다양한 채널을 통해 공유하는 것이다. 애초 비대면 원격 수업 전용 교실이 마련되어 있어 그 공간을 활용해 어설프나마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현실을 도외시한 무모한 계획이었다. 대본도 배우도 없는데 카메라부터 들이댄 꼴이라고나 할까.
한편, 영화 모임도 함께 시작하기로 했다. 책보다 한결 부담을 더 느낄 것이라 여겨서다. 이는 참가 자격을 동아리 회원들로 한정시키지 않고, 관람을 희망하는 아이들과 교사들로 점차 대상을 넓힐 요량이다. 이 또한 한 달에 한 번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당장은 방역지침에 따른 거리 두기로 20명 정도만 관람이 가능할 듯하다.
홍보할 겸 북한 관련 영화를 상영한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웬만한 작품들은 다 봤다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앞다퉈 오래된 영화로부터 최신작까지 제목을 줄줄 읊어댔다. <웰컴투동막골> <태극기 휘날리며> < JSA 공동경비구역> <강철비> <고지전> <베를린> <공작>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 등을 말하며 두세 번 본 영화도 수두룩하다고 했다.
사실 열거한 상업 영화들은 학교에서 공공연히 상영하기 힘들 뿐더러 통일 교육 목적으로 활용하기도 애매한 측면이 있다. 상영 계획 중인 작품이 대개 다큐멘터리 영화인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제 출품작 중에 통일과 북한 관련 영화를 선정할 예정이며, 현재 배급사에 연락해 가능 여부를 타진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적당한 상영작을 검색하다 언뜻 흑백 영화 같기도 한 낯선 작품 한 편에 눈길이 갔다. 2016년 열린 제15차 평양국제영화축전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우리 집 이야기>. 지난 2018년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에 출품된 9편의 북한 영화 중의 하나로, '북한 예술 영화'라는 부제를 단, 말 그대로, '오리지널' 북한 영화다.
스무 살의 나이로 고아 7명을 키우며 북한 전역에 큰 화제가 된 '처녀 어머니' 장정화의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전체 영상이 이미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상영 시간은 100분으로, 근래 북한에서 가장 잘 만든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화질이 좋지 않다는 게 흠이다. 고화질에 익숙한 우리로선 선뜻 시청할 마음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통일 열차가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