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당집터 다지기 전시관에서 이걸재씨는 스승인 심우성 선생의 혹독한 지도와 가르침 덕분에 민속학자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정신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한다.
조우성
- 장사익씨 권유로 소리를 시작한 건가요?
"그랬지요. 아이고, 생각해봐요. 그때는 공무원들이 야근을 밥 먹 듯 할 때요. 시간외 근무수당도 없을 때, 저녁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서 야근하다가 아홉시나 열시에 퇴근할 때요. 장사익 선생의 그 말이 없었다면 제가 소리한다고 흉내 내지 않았을 거에요. 너무 바빴거든요."
- 천재 피아니스트 임동창 선생과도 인연이 있다고요.
"스승인 심우성 선생님은 소리를 하고 싶으면 제대로 해라며 임동창 선생을 만나라고 하시데요. 그런데 전화를 해도 만나주지를 않아요. 그러다 기획자 한 분이 고택음악회를 열었는데, 임동창 선생과 저랑 함께하는 공연을 짰어요. 그 인연으로 임동창 선생을 처음 만났는데, '내가 평생을 집중해서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천재다'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분이 제 소리의 장단점을 집어주시고, 노래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어요. 이분이 일러준 대로 연습하고는 1년 만에 대전에 있는 마당 소극장에서 하루에 1시간 반씩 20일간 공연을 소화해 낼 수 있게 되었어요."
- 좋은 가르침을 받았군요.
"임동창 선생과 두 번째 공연 때 저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시골분들을 데리고 가서 연습을 했어요. 임 선생이 제가 회원들 연습시키는 것을 보더니 "예술의 완성을 위해서 사람을 잡지는 말아라, 즐겨라"고 말해요. 그 분이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놀이예요. 그래서 저도 그 이후로 노래를 즐기기 시작한 거예요. 저와 함께하는 분들이 대부분 노인들인데, 연습을 즐기기 시작하니까 실력이 빨리 늘어요. 임동창 선생이 저에게 끼친 영향은 굉장히 큽니다."
- 이야기 중에 계속 스승인 심우성씨가 나오는데 어떤 분인가요.
"심우성 선생은 민속학자면서 1인 무언극 배우였어요. 일본 관동 대지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그 내용을 심우성 선생이 아시고 백기완 선생과 돈을 모아서 큰 종을 만들어서 일본 관동 지역에 갔어요. 삼발이로 큰 종을 매달아 놓고 웃통을 벗고 그 종을 하루 이틀 몸으로 쳤어요. 그리고 3일째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왔을 때 "내가 한국 사람인데, 관동대지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위로행사도 하지 못해서 종을 몸으로 쳐서 그때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위로한 것이다"라고 기자회견을 하신 거예요. 그 일로 재일동포들에게 전설이 되었지요."
- 심우성씨와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이 분은 제 고향 사람이세요. 우리 가족도 다 알아요. 이 분이 공주 민속극 박물관 관장으로 내려 왔을 때, 제가 공주시청 문화관광과에 근무하면서 민속 채록을 하고 있을 때라 조사한 것을 정리해서 선생님께 감수를 받았어요. 제가 마을 사람들이 쓰는 사투리를 표준어로 고쳐 가지고 가면 "민속에서는 그 마을에서 쓰는 말이 표준어다"며 혼나기도 하고, "조사할 때 민속만 조사하지 말고 마을의 역사와 유래 등 일반 민속을 포함해 조사해야 그 민속의 정서가 제대로 나온다"고 가르침을 주셨어요.
이 분이 저에게 알려주신 것은 민속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의 '지식 싸움'이 아니라 얼마나 소중히 다루고 있느냐의 '의식 싸움'이라는 거죠. 또 하나, 민속은 그 민족의 잘난 놈들인 귀족들이 한 것이 아니고 보통사람들이 행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를 초라하게 생각하는 놈은 민속하면 안 된다고, 그걸 가르쳐 주신 거예요. 심우성 선생님은 민속을 대하는 자세와 정신에 대해서 큰 가르침을 주셨지요."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
저널리스트, tracking photographer.
문화, 예술, 역사 취재.
공유하기
부인 장례식장에서 파안대소한 박동진 명창, 저 때문입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