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지상변압기 위에 누군가 마시고 버린 빈 '박OO'병이 올라앉아 있었다.
박진희
어느 비 오던 날이다. 길을 걷다 보니, 지상 변압기 위에 다 마신 자양강장제 박OO 한 병이 올라앉아 있다. 평소 같으면 무심코 지나쳤겠지만, 비에 젖은 모습 때문이었는지 유난히 클로즈업되어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케케묵은 상념을 떠올리기에 이르렀고, 주체못할 그리움, 측은함, 고마움...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쳤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할머니께서 식사 때마다 한 방울 두 방울 아껴가며 참기름 보관용으로 쓰시던 박OO 병이 먼저 떠올랐다. 손목을 기술적으로 돌리고 꺾어 단 한 방울의 참기름도 허투루 쓰시지 않으려 결연했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요즘처럼 소주병에 담긴 참기름을 기분 내키는 대로 이 요리 저 요리에 퍼부어대며 제맛 내는 비법으로 치부하는 내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알뜰살뜰 거둬주신 분이셨다.
큰아들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안았던 어머니 친구분도 생각났다. 빚쟁이들한테 하루가 멀다고 시달리는 데다, 다만 얼마만이라도 벌어 생활비에 보태야 했던 처지여서 어머니 친구분은 노동판에 뛰어들게 되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은 쉬이 손에 익지도 않았고, 약한 체력으로 노동의 강도에 휘둘리다 보니 한동안은 음식을 넘기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때 유일하게 드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박OO였단다. 보약을 대놓고 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삼시 세끼 박OO로 버티셨다니.... 들여다보지 않아도 다 타들어 간 그 속이 훤하다. 다행히 큰 고비 작은 고비 넘겨 크나큰 근심 걱정은 줄었지만, 지금도 어르신은 '인이 백이어서' 기운이 없는 날은 박OO를 박스째 대놓고 드신단다.
2년 전에 잃어버린 신분증을 찾아주신 은인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그분은 실제 박OO 광고로 얼굴을 알린 출연자였다. 신분증을 되찾고 마음이 놓인 것도 잠시, 광고에서 본 인물이 '떡'하니 눈앞에 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요즘은 본업인 영화 관련 일을 하러 동분서주 중이라는 풍문만 듣고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참으로 이 피로회복제와는 연(緣)이 예사롭지 않은 듯하다.
지난달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여벌 앞치마가 있어 식당 하는 이한테 요긴하게 쓰라고 갖다주었다. "빨래하기 쉬운 옷감에 양옆으로 주머니가 있어 너무 좋아요"라고 흡족해하는 모습이 민망할 정도였다. 게다가 '성의' 표시라며 식사 한 끼를 대접한다고 잠시만 앉아 계시란다.
'그깟 소용 닿지 않는 앞치마 하나 건네주고 뭔 식사 대접을 받나' 싶어 서둘러 내빼려 하니, 급하게 냉장고에서 박OO 하나를 꺼낸다. "그럼, 이거라도 드시고 가세요" 하며 건넨다. 평소 약국에서 하나씩 주는 자양강장제도 안 먹고 놔뒀다가 제조연월일이 지났다는 핑계로 버릴 만큼 마뜩잖다. 하지만 그마저도 거절하면 서운해할 것 같아 어정쩡하게 받아들고 말았다.
피로를 날려주는, 고마운 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