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북 연통제 사건 공판1920년 임정의 연통제 조직은 면지역까지 조직된 지방자치제도였다. 출처 : 동아일보( 1920.08.22.)
동아일보
1920년 12월 중순 일본 경찰에 의해 함경북도 연통부 조직이 발각되어 윤태선을 비롯한 47명의 동지들이 재판을 받았다. 당시 이 당시의 재판과정는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되었다. 동아일보는 '세인(世人)을 경해(驚駭:크게 놀람)케 한 연통제 공판'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온 세상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더욱 당국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라고 보도했으며 당시 재판 기록을 연재하였다.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하던 신한민보 9월 23일자에도 거의 그대로 실렸다. 1920년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윤태선은 47명 중에서 최고형인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윤태선의 기록보다 더 구체적 기록이 있다. 강택진의 군자금 모금 사건의 내용은 실상 임정의 연통부와 관련된 내용으로 오택의 기록과 연관성이 깊다. 1919년 9월의 취운정 모임에는 강택진(姜宅鎭), 박시묵(朴時默), 박상목(朴尙穆), 김일청(金一淸), 이상욱(李尙旭), 송병조(宋秉朝), 윤태선(尹泰善) 7명이 모였다고 강택진의 재판기록과 신문조서에 나온다. 8월 초 강택진을 만난 박시묵은 애국금 수합위원, 상해임시정부 특파원, 애국금 수령서 등을 보여준다. 윤태선이 소지한 문서는 독립운동 유고문(諭告文), 대한임시정부 13도 총감부 명의의 찬의사(贊義士) 임명사령서, 동 명의의 애국금 수금위원 사령서 등이었다. 취운정 모임 이전에 강택진은 박시묵과 아는 사이이고 또 종전부터 면식이 있는 이재영(李在永)에게 계획을 이야기하여 동료로 끌어들여 이재영의 소개에 따라 곽병도(郭炳燾, 羅炳一, 당시 41세, 仁川 米豆거래소중개업), 강천민(康天民)을 만나 의논한 결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종사하게 되었다.
취운정의 7명은 박시묵의 발의로서 애국금 모집 기관으로 경성에 조선 13도 총감부를 설치하고 총간부 내에는 총무부(윤태선), 노동부(박상목), 교통부(김일청), 재무부(박시묵), 경무부(송병조), 편집부(이상욱), 교섭부(강택진) 등 7부를 두는 것으로 협의 결정하였다. 맹주는 총무부가 되었다. 총감부는 경성에 두었지만 소재지가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부장은 결정되지 않았다. 수금 지역과 담당은 연고지 지방으로 하였다. 함경남북도(경성) 윤태선, 평안남도(성천군) 박상목, 평안북도(의주군) 김일청, 평안북도 이상욱, 경상남도(부산) 송병조, 경상남북도(밀양) 박시묵, 경상북도(영주군) 강택진이었다. 강천민, 곽병도, 이재영은 조선13도 총간부 특파원으로 애국금 수합위원의 사령을 교부하여 애국금을 모으도록 하거나 직접 모았다. 이런 상황을 강택진은 상해에 가서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신규식, 이시영 등과 면회하고, 상황을 보고했다.
오택의 기록에는 함북 책임자 최창익, 함남 책임자 윤태선, 경북 책임자 송전도, 경남 책임자 오택이었다. 강택진 관련 자료의 경남 책임자인 송병조(宋秉朝)는 오택의 송전도(宋銓度)와 그 이름이 다르다. 하지만 송전도가 부산 동래 복천동 출신이기 때문에 송병조가 송전도일 가능성이 크다.
송전도(宋銓度, 1891~1978)는 부산 동래 복천동 출신이다. 1907 동래 개양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09년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함경북도 부령군으로 이주하여 남형우, 안희제, 김동삼, 윤현진 등과 같이 국권회복을 위한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그 후 북경, 상해, 봉천 등에서 애국독립단체 동제회(同濟會)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길림·북간도·함경도를 오가며 활동하였는데, 함경도 쪽에서는 신간회와 『동아일보』 지국을 맡아 활동하였다. 송전도의 이력에도 연통부 활동 상황은 없지만, 동제회 연락책 활동이 연통부와 관련된 것이 가능성은 크다.
1919년 10월 경 이재영과 강천민은 강택진의 요청으로 애국금 모집을 위해 경북 영주(榮州)지방에 갔지만 성과가 없었다. 결국 애국금 모집 조선 13도 총간부 명의로 유고문이라는 제목에 조선독립의 임무를 설명하고 이것을 완성시키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천명한 서면을 각처에 발송하였다. 11월 곽병도와 이재영은 영주에 다시 가서 정규집(丁奎集)과 정규창(丁奎昌)에게 각 각 300원을 모집하여 박시묵에게 전달하였다. 곽병도와 이재영은 영주에 갔을 때 상해임정 특파원 명함표를 가지고 다녔다. 곽병도에 따르면, 이재영(李在永)은 충청북도 단양군 사람으로서 경성 주소는 경운동 삼산(三山)약국 내이고, 상해에서 파견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재영의 주소와 혐의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체포한 기록이 없다. 역사적 자료에는 검색되지 않는다. 혹시 이재영이 부산 정공단의 오재영, 즉 오택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1921년 5월 25일 강택진은 징역 6년에, 곽병도는 징역 4년을 구형받았다. 6월 3일 판사는 강택진에게 징역 2년, 곽병도는 징역 1년 6개월, 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하였다.
오택이 함북 책임자로 지목한 최창익(崔昌益, 1896~1956)은 함북 온성(穩城) 출신으로, 1918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19년 3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그 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21년 7월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경제과 유학 중 학우회를 조직해 강경·전주·군산 등지에서 순회 강연을 하다가 전주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5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의 이력에는 현재 연통부 관련 사실이 잆다. 오택의 기록에 따르면, 유학 가기 직전에 연통부 활동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최창익은 1925년 졸업 이후 국내외에서 공산주의자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중국에서 김두봉, 무정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38년 조선의용군에 참여하고, 1942년 조선독립당을 창당하여 부주석이 되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연안파로 활동하였다.
윤태선과 강택진의 재판 기록에는 오택(오재영)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오택의 위장술이 뛰어난 듯하다. 함북의 최창익과 경북의 손전도, 경남의 오택은 연통부와 관련한 역사 기록은 현재 오택의 기록 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강택진의 자료를 통해 볼 때 오택의 기록은 사실성이 인정될 수 있다.
오택은 9월 말 각종 서류를 많이 부산으로 운반하여 좌천동 주택 후원에 묻어놓고 각 군에 한 사람씩 정수분자를 선택하여 책임자를 정하고 중요한 일을 실행하였다. 제일착으로 경남 대표원으로 송전도와 오택은 동래 김병규를 추천하여 13도 간부 연석회의에서 통과되어 임명장을 주려 하니 김병규가 받지를 않았다. 결국 임명장을 집 후원에 묻었다.
김병규(金秉圭, 1880/1887~1962/1960)는 부산 동래 출신으로 1906년 개양학교를 졸업하고 삼락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8년 동래은행 본점 지배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에는 안희제가 결성한 부산예월회 회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회원은 양신의 김철수(부산상사, 고려상회 지배인)와 전석준(무역상, 일금상회), 울산의 송태관(경남은행장, 삼산자동차 중역), 부산의 김종범(조선주조 중역)과 문영빈(백산상회 감사), 장우석(구포은행, 구명학교 설립자) 그리고 경주 최부자집의 최준과 최순 등이었다. 예월회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에 따라 교육제도의 개편 논의에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산업개선 청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마 연통부에 활동하는 것이 김병규의 사업에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 김병규는 그 후 일제 강점기 지방 관료와 의원으로 활동하였지만 민족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였다.
경북의 대의원으로 곽종학(郭鍾鶴)의 임명장을 송전도가 전달하니, 곽종학은 의관을 정제하고 분향사배 후 정중히 받았다. 그는 나중 경북 유림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오택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곽종학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당시 각 지역의 명망가를 추천하였지만 실제 임명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 일로 보면 오택은 연통부의 특파원 역할을 한 듯하다. 당시 특파원이 지역 유지에게 '연통제 취지서'를 전달하고 이 취지에 승낙하는 인물들과 상의하여 적임자를 추천받았다. 특파원은 추천받은 적임자를 연통제 직원에 임명할 수 있었다. 특파원은 「임시연통제」가 공포된 7월에 가장 많이 파견되었으며, 이동녕(李東寧) 내무총장 시기까지 모두 32차례 파견되었다. 특파원 중 경의선 연선은 독고감, 경원선 연선은 명제세, 경부선 연선은 김상문(金祥文)이었다. 김상문은 1919년 3월 13일 양산 통도사 신평만세운동의 주모자 중의 한 사람으로 통도사 스님이었다.
1919년 음력 9월 15일 오택은 부산에 온 김두옥(金斗玉, 통영)과 김두현(金斗鉉, 하동)에게 독립운동에 노력할 것을 서약하게 하고, 격문 배포를 통한 인심 동요와 독립 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정에 보낼 것을 협의하였다. 그때 오택은 두 사람에게 윤태선이 보내 준 조선독립에 관한 고유문(告諭文) 10 매을 주고, "본부 찬의사(贊儀使)에 임명한다. 4252년 9월 13도 총감부"라고 인쇄된 사령서를 교부하고 격려하였다. 사령서는 경찰에 발각되면 곤란하므로 불태웠다.
최천택, 상여운구 독립운동을 하다
경남과 경북지역을 오가면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최천택에게 통영 만세운동에 관련된 이학이(李學伊, 1898~1919)가 부산형무소에서 옥사한 소식이 들려왔다.
통영 만세운동의 시발은 1919년 3월 8일 경성 배재고에 재학 중인 진평헌이 귀향, 3월 13일 장날을 기해 남망산공원에서 진평원, 양재원, 권남선, 김형기, 배익조, 모치전, 강세제, 이학이, 허장완, 서상호, 최천, 방중한, 김종원, 신수동 등 청년들이 거사를 결의하면서 시작됐다. 이학이는 당시 통영면사무소에서 면서기(面書記)로 근무 중이었다. 3월 9일 송정택의 사랑방에서 모여 만세 의거를 협의한 데 이어 3월 12일 재차 모임을 갖고 선언서의 기초, 운동의 방법 및 선언서의 배포 등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3월 13일 이학이는 자신이 근무하는 통영면사무소 등사판과 이웃 산양면사무소의 등사판까지 동원하여 동지들과 함께 '동포에게 격(檄)하노라'는 격문을 밤새워 1,200매를 등사하고 태극기도 따로 수백 매 만들었다. 그리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3월 14일 오전 1시 30분경 이학이는 강세제·허장완 등과 함께 등사판을 면사무소에 갖다 놓으려 갖다가 대기 중인 일경에 붙잡혔다. 당시 등사에 필요한 용지 2천 매를 일본인 나카무라 상점(中村商店)에서 구입하였는데, 주인이 이 사실을 일본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이 즉시 수사에 나섰던 것이다. 이에 따라 만세운동 계획이 발각되면서 나머지 6명의 동지들도 오전 3시에 전원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남자들은 검거되었지만, 13일 만세는 사전에 연락을 받았던 부산진일신여학교 출신인 통영사립유치원(진명유치원) 보모인 문복숙과 양성숙, 김순이가 통영중앙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일어났다. 세 처녀의 선창에 장터에 모였던 수천의 군중이 호응해 열광적으로 만세를 호창했다. 감옥에 갇힌 16살의 문복숙은 간수의 옥중 감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너희가 태산을 떠다 옮겨 놓을 수 있을지언정 태산같이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떠 옮기지 못할 것이며 또 너희가 강철은 굽힐 수 있으나 강철같이 굳센 우리의 마음은 굽힐 수 없다."
4월 2일 통영 중앙시장에서 다시 만세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통영 기생인 정막래와 이소선이 시위에 참여했다. 3‧1운동 당시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에게 독립사상을 가르치고 선동하는 독립투사였다. 통영의 예기조합 기생인 이 두 사람은 금반지를 팔아 상장용(喪章用) 핀과 짚신을 사서 다른 기생 5명에게 나누어 주고 같은 복장을 하고 기생단을 꾸려 시장으로 행렬을 지어갔다. 이 둘은 경찰관의 제지에 응하지 않고 최선두에 서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군중과 함께 시위를 하였다. 정막래와 이소선는 징역 6개월의 고초를 겪었다. 재판에서 이소선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여자가 간부(姦夫)가 아니라 본남편((本夫)를 찾아 섬기려 함과 같은 이치이니, 무엇이 죄가 된다는 말이오"라고 하였다.
시위를 준비했던 이학이는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4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여독으로 가출옥했으나, 1919년 9월에 부산형무소 부설병원에서 순국하였다.
최천택은 이학이의 죽음을 듣고 그의 시체를 인수했다. 부산형무소 앞에는 우국시민, 학생, 상인 등 500여 명이 모여들었다. 부산경찰서 형사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최천택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조의금을 거둬 발인을 했다. 구호금 모인 돈이 600엔에 달했다. 그는 일경의 집요한 요청을 뿌리치고 청년들과 함께 이학이의 영구를 김해까지 운구해갔다. 김해 청년들이 이를 이어 마산까지 운구하고, 마산지사들이 진동과 배둔까지, 통영 청년들이 배둔에서 통영까지 릴레이 운구를 해왔다. 마치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의 운구를 나른 것과 같았다. 최천택은 이 거룩한 주검의 행렬을 끝까지 앞장서 인도했다.
8일장을 치르는 동안 통영인들이 울분과 독립의 의지로 들끓었다. 통영지역의 사회장(社會葬) 형식으로 치뤄졌으며, 이 지역 인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장례기간 동안 곳곳에서 군중들이 만세를 불러 죽음 이후에도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의 묘지는 원문 가까운 '몰골이 산' 중턱에 안장돼 있고 '조선 이학이지묘' 묘석이 있고 뒷면의 행적들은 누군가 훼손하여 현재 볼 수 없게 됐다.
또 6개월 형을 받은 허장완은 부산형무소에서 마산형무소로 이감, 모진 고문으로 그해 10월 9일 옥사했다. 허 열사의 시신은 마산청년단들이 배둔까지 운구하고, 배둔 청년들은 고성까지, 고성 청년들은 다시 통영까지 운구하는 등 시체를 옮겨 왔으며 운구를 하는 길목마다 주민들이 일경의 삼엄한 경비 아래에서도 민족혼을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