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글쓰기 수업 백일장에서 글을 쓰는 손종식님.
성프란시스대학
선바위
무시무시한 바위산
전설의 고향 남태령 고개를 지나 선바위
구미호에 홀려 나는 오늘도 감옥에 간다.
미친 불나방처럼 족쇄에 매여서
오늘도 나는 죄수가 된다.
미친 광란의 질주가 있는 곳
어마어마 막지한 간수가 있는 곳
렛츠런 감옥으로
무소불위 철장권세를 가진
머니(돈) 시추하기 위하여
손종식님은 성프란시스대학 글쓰기 시간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시를 썼다. 관악산 남태령고개에 구미호가 있다는 전설처럼, 그 시절 구미호에 홀린 듯 '렛츠런' 경마장에 다녔다. IMF 사태 이후로는 중국집도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일을 다시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의 나이 벌써 사십대 후반이었다.
'죽어 있는' 사람이니 다른 자격증을 딸 수도 없고,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었다. 영등포 OB공원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 신분증으로 일용직 일을 나가면 한 일주일은 여인숙에서 지냈다. 1년 6개월이 지났고, 그게 한계였다. 몸은 급속도로 안 좋아져 결핵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는 노숙도 어려워진 몸으로 13년간 줄곧 다시서기센터(서울역 거리홈리스를 지원하는 사회복지기관. 성프란시스대학을 설립‧운영한다) 일시보호 잠자리를 이용했다. 자연스럽게 술과 경마를 끊었다. 다시서기센터에 있으면서 성프란시스대학에 입학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쉽게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입학을 결심한 계기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인문학 하는 사람은 아닌데, 나 같은 경우인 한 사람이 1년 좀 넘게 걸려서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 말 듣고 아, 한번 해보자 그래가지고 하게 됐어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누군가가 '해냈다'는 사실이 그에게 와 용기가 됐다. 손종식님은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누군가가 용기를 냈으면 하고 바란다. 그게 부담스러울 수 있을 인터뷰를 선뜻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다.
성프란시스대학의 학무국장과 자원활동가들이 본 손종식님은 '잘 웃어서 주위까지 환하게 만드는 사람',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을 안 하는 사람', '의지가 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한때 술과 경마에 빠져서 돈을 잃었지만, 30년 동안을 한 달에 한두 번 쉬어가며 중국집 일을 했고, 성실함을 인정받아 배달 보이에서 주방보조로, 결국 주방장까지 됐다.
입학 후 1학기 동안 그는 한 번도 수업을 빠지지 않았다. 성프란시스대학의 학무국장과 진행한 사망신고 복원과정은 첫 단추부터 쉽지 않았다. 매순간 위기에 봉착했다. 스트레스로 정신과 증상이 나타나 결국 1달 반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첫 번째가, 본인임을 확인해야 하는데. 사망신고돼있으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내가 나라는 거를. 본인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가족을 찾을 방법도 없고." (마명철 학무국장)
사망신고를 정정하려면 가정법원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일단 (연락되는) 가족이 없으면,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고향인 구례까지 내려갔지만, 동주민센터에서는 '사망신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제적등본조차 떼어주지 않았다. 자신이 '신원불명'의 사람이라는 사실부터 확인되어야 했다.
손종식님은 마명철 학무국장과 함께 서울역 파출소를 찾아가 십지문 확인을 요청했다. 그마저도 처음엔 거절당했지만, 노숙인 담당 경관인 박아론 경사가 이야기를 듣고 십지문 확인을 도와줬다. 지문이 등록되지 않은 '신원불명'의 사람이라는 경찰 공문이 자신을 증명하는 첫 번째 서류가 됐다.
공문을 들고 남대문 경찰서를 찾아 '가족찾기' 신청을 했지만, 전쟁이나 해외입양 등의 사유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또 다시 거절당했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손종식님은 '옛날처럼 막히는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회현동주민센터에서 경찰 공문을 보고 사유를 인정해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위한 임시 사회보장번호를 발급해주고, 제적등본을 열람하게 해주었다. 자신이 사망신고되었다는 공식 서류를 36년만에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