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무렵 제작된 오케레코드 음반 재킷. 고복수를 제외한 걸작집 가수 일곱 명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고복수는 1940년에 오케레코드를 떠났다
이준희
그런데, 마지막 걸작집 가수인 백년설이 입사하기 전, 1941년 1월에는 오케레코드 공간에 다시 큰 변화가 생겼다. 남대문통 3층 사옥에 불이 나서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던 것이다. 화재 며칠 뒤 오케레코드는 세 번째 장소로 이전을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몇 걸음 들어간 다옥정 92번지, 광복 이후 바뀐 주소로는 다동 92번지가 새로 옮겨 갈 자리였다. 단, 기존 건물을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녹음실까지 완비한 새로운 사옥을 짓기로 결정되었다.
원래 다옥정 92번지에는 데이치쿠레코드 운영 개입 이후 1938년 1월에 이철이 독자적으로 설립한 조선녹음주식회사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때 일종의 자리 맞교환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녹음주식회사는 조선연예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불에 탄 남대문통 건물로 옮기고, 오케레코드는 다옥정 자리에 신사옥 공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건축이 진행되는 석 달 남짓 동안은 두 회사가 함께 기존 남대문통 건물을 일단 수리해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다동 92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은 서울 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오피스 빌딩이다. 앞서 거쳐 온 관철동이나 남대문로와 마찬가지로,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이 여기서 오케레코드를 떠올릴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다.
식민지 시기의 그늘이 보이는 오케레코드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