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을 넘자!" 강원도 바닷가 마을의 아이들이 입시 레이스에 서서 다짐하는 말이다.
최다혜
우물 탈출 레이스의 무한궤도
나는 다시 대관령을 넘었다. 이번에는 역방향이었다. 강원도 임용을 쳐서 고향인 동해시로 돌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였다. 우물 탈출 레이스가 끝난 줄 알았건만 착각이었다. 우리는 매일 학교로 출근하며, 스스로를 개구리로 여기며 체념하거나 분투하는 아이들을 만난다.
곁에 선 다른 아이들도 "도계가 좀 부족한건 사실이잖아요"하며 말을 보탰다. 나는 속이 상했다. 이건 겸손을 위한 자기낮춤도, 농담을 하기 위한 현실 비틀기도 아니었다. 철저한 체념과 자기 수긍에 가까웠다. 객관적 지표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방에 있는 대학의 연구 성과나 교육 수준이 서울의 유수 대학보다 떨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지방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과소평가 받을 까닭은 없다. - <선생님의 보글보글> 중, 이준수 지음
울산에서 나고 자란 남편은 좀 놀랐다. 대한민국에서 GDP 1~2위를 다투었던 유복한 동네, 울산에서도 '지방'에 대한 얕은 자조가 있다. 하지만 대관령 안쪽 동네 아이들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어린이들이 깊은 고민도 없이 빠르게 자신의 삶을 과소평가하는 데 속이 상했다. 강릉시에서도, 삼척시의 탄광촌 도계에서도 여러 초등학생 아이들이 그랬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불안을 고스란히 투영할 뿐이었다. 20세기 어린이였던 오늘날 어른들이 '우물 탈출 레이스'에 여전히 올라있듯, 21세기 어린이들도 여전히 그 무한궤도에 탑승한 것이다. 삼척에 사는 어른들은 원주를 부러워하고, 원주에 사는 어른들은 수원을, 수원은 서울을, 서울은 그 안에서도 강남을 꿈꾼다. 아이들도 그렇다.
삼척은 원주에 밀리고, 원주는 수원에 밀리고, 수원은 서울에 밀렸다. 뉴욕에서 전학생이 오지 않는 한 서울이 '짱'을 차지하는 구조였다... 아이들은 벌써 '지잡'의 삶이 대도시보다 못하다고 인정해버린다. - <선생님의 보글보글> 중, 이준수 지음
이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막연하다. 불안의 기원도, 불안의 해소법에도 정답은 없다. 각자의 방법으로 불안을 상쇄하는 수밖에. 남편은 남편 방식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울산에서 춘천으로, 춘천에서 동해로 우물 탈출 레이스에서 역주행 한 남편만의 방식. 그것은 '지금, 여기'를 만끽하기였다.